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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삶'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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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삶'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서
  • 김형규
  • 승인 2017.10.20 09: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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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의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 <13>미국 현대사의 풍운아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 전경.

우리나라 청소년에게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상당수 “할리우드 배우 아닌가요?”라고 넘겨짚을 겁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헤밍웨이의 자손 중에 할리우드 배우가 있으니까요.

중년 이상은 청년기 문화향수를 ‘서양고전’을 통해 해소했습니다. 헤밍웨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헤세 등등.

“아, 감동적으로 읽었어”라고 흔히 떠벌리지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서양고전이란 것이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가 우리 정서와 딴판일 뿐더러 종교색이 강하고 지역명, 건축물, 음식 등 의식주 용어가 생소합니다. 사촌 간 애정심리까지 드러나 혼란을 주기도합니다.

그래도 읽은 티는 내야하니까 졸린 눈을 비벼가며 얼렁뚱땅 독파를 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상황이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 문학작품의 수가 절대 부족했고 서양문화를 선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현찰만 받는 키웨스트 ‘헤밍웨이 집’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 모퉁이에는 '신용카드 받지 않음'이란 안내판 걸려있다.

“입장료를 현금만 받는 이유가 뭐죠.”
“카드도 받았었는데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불만이 많아 현금만 받기로 했다우.”
고희는 넘겼을 법한 매표소 여직원의 생뚱맞은 대답입니다.

미국 플로리다 키웨스트 와이트헤드 가(街)(Whitehead St.)에 자리 잡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집은 입장부터 살짝 기분을 잡치게 합니다. 모퉁이 안내판부터 아예 ‘NO CREDIT CARDS’라고 못 박아 놓는 겁니다.

신용국가인 미국에서 크레디트 카드가 무용지물이라니 납득이 안 갑니다. 행렬이 길지도 않은데 성인 기준 1인당 14달러를 현금으로 꼬박 받아 챙깁니다. 과연 이집이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 주자이자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에 빛나는 헤밍웨이의 유산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헤밍웨이 집에는 고양이집이 많다.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 침대를 점거한 여섯 발가락 고양이.

현관에서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확인하고는 A4용지 5장짜리 한글안내서를 건네줍니다. 인쇄된 팸플릿이 아닌 한국인 투어 가이드의 도움을 받은 한글 타이핑 복사본입니다.

각층마다 헤밍웨이의 족적을 담은 사진과 영화포스터 등을 내걸고 특히 헤밍웨이가 아꼈다던 수십 마리의 여섯 발가락 고양이가 침대는 물론 마당 곳곳을 점거했지만 딱히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헤밍웨이가 키웨스트에 머문 시기는 1928년에서 1940년까지입니다. 햇수로 13년이지만 국외종군기자와 여행 등으로 실제로 거주한 기간은 2-3년도 되지 않은 듯합니다.

키웨스트보다는 20여 년간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년), ‘노인과 바다’(1952년) 등 주옥같은 대표작을 써낸 쿠바 수도 아바나 외곽 핑카 비히아(Finca Vigia)가 문학적 고향이라 할 것입니다.

삶의 에너지 투우와 조우 

헤밍웨이가 아꼈던 낚싯배에 대한 추억을 전시했다. 헤밍웨이는 1934년 낚싯배 '필라'(Pilar)를 주문한다. 필라는 두 번째 부인 폴린의 애칭이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다.

헤밍웨이는 1928년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와 결합하면서 키웨스트로 이주합니다만 이듬해 파리로 떠나 스페인 팜플로나를 자주 방문합니다. 프랑스 국경에서 가까운 팜플로나는 20대 때인 1921년 유럽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두 차례 정도 방문했던 곳이죠.

헤밍웨이는 그때 투우(鬪牛)와 운명적인 조우를 합니다. 종군기자에다 거친 바다낚시와 사냥을 즐기는 상남자에게 투우는 새로운 삶의 활력소였습니다.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 기간 동안  젊음을 마음껏 불살랐습니다. 헤밍웨이로 인해 팜플로나는 소몰이 축제로 유명세를 탑니다.

1933년에는 아프리카로 사파리를 떠나 ‘킬리만자로의 눈’(1936)으로 녹여내고 1936년에는 북미신문연맹(NANA)의 요청으로 스페인내전에 참가해 종군기자로 맹활약합니다.

스페인내전이 끝나고 1939년 하반기 키웨스트에 돌아오지만 곧바로 폴린과 이혼하고 마사 겔혼과 결혼하면서 1940년부터 쿠바에 안착합니다.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은 두 번째 부인 폴린이 소유했다가 제3자에게 매각합니다. 헤밍웨이의 족적이 많지 않은 이 집이 지금은 버젓이 헤밍웨이의 이름을 내걸고 입장료를 현찰로 챙깁니다. (하긴 우리나라 지자체도 유명인이 스쳐지나간 자리라면 관광객 유치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과장광고를 하죠.)

문학적 고향 쿠바에서 전성기

헤밍웨이의 초상화.

쿠바 이주 후에도 헤밍웨이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부가 함께 종군기자로 전선에 뛰어듭니다.

종전 후 1946년 말 쿠바로 돌아와 ‘노인과 바다’ 창작에 몰두합니다. 집필과 낚시, 술 등으로 생활하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에 의한 쿠바혁명에 이은 1961년 미국의 쿠바 침공(피그만 침공) 실패로 인해 미국 아이다호 케첨(Ketchum)에 자리 잡습니다.

일부에선 카스트로가 쫓아냈다고 하지만 미국의 종용과 양국관계를 감안한 헤밍웨이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입니다.

헤밍웨이는 관념이나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하게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기자와 소설가의 차이에 대해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기자는 굳이 현장에 가지 않고 다음날 경찰서에서 사고처리기록만으로 기사를 쓸 수 있지만 작가는 반드시 사고현장에 가서 느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1차‧2차 세계대전, 그리스-터키전쟁, 스페인내전 등 전 세계 전쟁터를 쫓아다니고 위험한 청새치 낚시와 아프리카 사파리를 체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험을 통해 영감을 얻으려는 성향 때문에 총상과 비행기 추락, 교통사고 등을 당해 말년에는 부상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결혼도 네 번이나 한 정력가입니다.

투우, 스페인, 쿠바라는 키워드는 그의 주요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의 대표작과 투우 관련 작품에 투영됩니다.

전설적 투우사 가문과의 만남

정원에 복싱을 즐긴 헤밍웨이의 일화를 소개한 안내판이 있다.

스페인 남부 누에보다리(Puente Nuevo)로 유명한 론다(Ronda)에는 헤밍웨이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팜플로나도 아닌 론다에 헤밍웨이 기념물이 건립된 이유는 뭘까요.

론다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전설적인 투우사 카예타노 오르도네즈(1904-1961)와 그의 아들 안토니오 오르도네즈(1932-1998)의 출신지입니다.

헤밍웨이는 팜플로나 투우장에서 본 카예타노 오르도네즈에 매료돼 20대 때 쓴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의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라는 인물로 등장시킵니다. 아들 안토니오 오르도네즈는 ‘위험한 여름’(The Dangerous Summer, 1985년 단행본 출간)이란 르포 시리즈에 투영됩니다.

헤밍웨이는 안토니오와 오랜 친구로 지내면서 말년에 전국 투우장 투어에 동행합니다. 스페인에서의 투우장 르포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열정이었습니다.

논픽션 ‘오후의 죽음’(1932)은 스페인사람보다 폭넓은 이해력으로 투우를 분석한 글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헤밍웨이는 투우장을 생과 사를 치열하게 넘나드는 전장(戰場)의 연속으로 이해한 듯합니다.

‘투우장은 전쟁이 끝난 이후 삶과 죽음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인간과 투우가 대결하는 순간이야말로 진실의 순간’이라고 믿습니다. 스페인 투우는 지금 많이 사라졌습니다. 동물학살이라는 비난에 거의 굴복한 상태입니다.

스페인내전(1936-1939)이 터졌을 때 선뜻 장비를 기증하고 종군기자로 나선 이유도 투우의 나라 스페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1930년대 키웨스트에서 생활했음을 설명해주는 안내판.

헤밍웨이는 도시노동자, 농민, 중산층과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모인 무정부주의자, 사회‧공산주의자들의 결집체인 공화국 진영에 들어가 파시스트이자 자본가 종교계 등 보수파와 독일,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후원을 받는 프랑코 반란군에 대항한 것이죠.

스페인내전은 세계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입니다. 역사에서 ‘만일~’이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나 다름없지만 스페인 내전이 공화국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면 이후의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입니다.

스페인내전에 민간차원의 다국적 ‘국제여단’의 지원군이 결성됐다면 한국전쟁에는 미국과 UN연합군 등 여러 국가기 남한을 돕기 위해 달려왔다는 점도 관심을 끕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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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 2018-01-03 14:48:27
헤밍웨이.. 누군가 물으면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작가예요.
초반 몇 줄의 문장에 '격공'하여 고백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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