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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미국식 기록, 뉴올리언스 '2차 세계대전박물관'[김형규의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 <11>유전자가 우수해서 다른 민족을 지배했나
미국국립 2차세계대전박물관 전경. 홈페이지 사진 캡처.

미시시피강에서 멀지 않은 뉴올리언스 도심지 매거진 스트리트에는 국립 2차 세계대전 박물관(The WWⅡMuseum)이 2000년 6월 건립됩니다.

뉴올리언스와 2차 세계대전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찾아보니 ‘히긴스 인더스트리’(Higgins Industries)가 뜨는군요. 히긴스 인터스트리社가 뉴올리언스에서 건조한 수륙양용정((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은 2차 세계대전에 첫선을 보여 혁혁한 전과를 올립니다.
        
우리나라 전쟁역사는 주로 패전과 굴욕의 후유증 때문인지 이런 박물관하면 고리타분하고 답답하다는 선입견을 버릴 수 없으나 이곳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이 박물관은 뉴올리언스의 모든 관광지 중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며 미국에서도 선호도가 세 번째로 높은 곳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박물관 내부에 들어서자 쇠락해가는 뉴올리언스 시내 분위기와는 달리 남녀노소 관람객들로 붐볐습니다.

전시물도 실제 군용기를 천장에 매달아 사실감을 전달하고 화포와 전차, 각종 무기류 전시는 전쟁영화세트장을 방불케 하더군요. 각종 역사사료와 동영상자료도 함께 감상하면서 내부를 둘러보는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진지하고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미국은 이 박물관을 통해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축은 바로 ‘USA’임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누리는 미국의 번영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강력한 나치군과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2대1로 맞서 싸워 이긴 소중한 노획물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은 거죠.

미국이 아프리카 카세린 패스 전투에서 독일의 롬멜전차군단에 패배한 기록도 교훈으로 박물관에 남겼다.
미군과 일본군의 개인화기를 비교 전시했다.
박물관 입구 보도블록에 참전용사의 이름을 새겼다. 좌측에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 이름이 보인다.

전쟁박물관에서 애국심‧자긍심 고취

미국과 일본이 맞붙은 태평양전쟁은 강대 강끼리 붙은 제국주의 최종결승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과정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만 배경 정도는 상상해볼만 합니다.

한쪽이 없으면 죽고 못 살 것 같았던 미-일 양국의 우정도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제국식민주의의 속성이죠. 흔히 인간 됨됨이는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합니다. 잘 먹고 잘 살 때야 주변을 보살피고 온정을 베풀기도 하죠. 적선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남을 해코지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갑질을 남발하는 놈들도 많지만...)

미-일 양국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를 사이좋게 양분하며 세를 다졌지만 1930년대 세계공황이 닥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군사대국화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일본은 안정적인 생필품과 석유 루트확보가 시급해졌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유전에 눈을 돌릴 수밖에요.

중국정복은 오래전부터 숙원사업이었고 과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에 ‘하면 된다’는 자기최면에 빠져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도발합니다. 침략의 야욕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습니다. 우리나라를 강제합병할 때 내선일체나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렸던 것처럼.

대동아공영권은 서양세계의 반발을 삽니다. 미국 입장에서 일본의 급성장은 마음에 걸립니다. 더욱이 중국을 일본에 넘겨주면 태평양 지배권은 물론 동남아시아로 가는 길목이 좁아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에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중국을 측면 지원합니다. 둘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고 일본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해 미국과 지분협상을 시도합니다.

박물관 투어의 시작은 입영열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입장권이 군번 모양이다.
실제 크기의 항공기와 수륙양용정, 대포 등을 전시했다.
입장객들이 공군의 복장과 장비, 동영상을 관람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 담판 ‘태평양전쟁’서 일본에 KO승

결과적으로 오만방자한 일본군부가 미국을 태평양전쟁에 끌어들여 참패함으로써 전후 세계질서는 미국중심으로 재편되고 미국의 힘이 세계정의의 기준으로 자리 잡는 전환점이 됩니다. (일부 일본 우익은 진주만공격은 미국의 함정이었다나…)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면서 국내 인종차별문제 등은 불요불급한 사회문제로 미뤄둡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명저 <총, 균, 쇠>(문학사상사)는 ‘왜 인류가 먼저 시작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이 유럽을 정복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유럽의 세계 정복은 그들의 유전자가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백인우월주의를 반박하고 환경적으로 오랫동안 서로 단절된 채 지내다 절정의 순간 맞닥뜨린 결과일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이후 유럽 정복자들은 총기, 쇠 무기, 말 등의 군사력, 유라시아 고유의 전염병, 해양기술, 중앙집권적 정치조직, 문자 등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다른 대륙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유럽인들이 총, 균, 쇠와 같은 직접적인 정복수단을 가질 수 있게 된 요인을 야생먹거리‧야생동물의 작물화와 가축화에서 찾았습니다. 안정적인 농축업으로 정주생활이 가능해지자 각종 발명과 항해술 등 문명개발에 몰두하고 인적 조직까지 갖추게 됐다는 것입니다. 항상 옮겨 다녀야 하는 유목민의 경우 짐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마음대로 낳을 수 없고 장비를 개발한들 짊어지고 다닐 수가 없어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식민지 침탈이 성행하던 시기 유럽정복자들이 총과 말, 철제갑옷으로 무장했을 때 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원주민들은 신석기 시대의 수렵생활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노획한 일본군 장교의 군복과 일본도, 권총, 헬멧.
'총‧균‧쇠'는 민족간 정복과 피지배의 상관관계를 파헤쳤다.

 

환경영향 절대적…우월한 유전인자 무관

다이아몬드는 식량을 작물화한 최초 지역으로 현재의 지중해와 페르시아만 인근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이란, 터키 등-지금은 상당부분 사막화가 진행된 지역)를 꼽았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시작된 식량생산이 환경과 지형조건에 따라 먼저 유라시아로 전파됐다는 것이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환경적인 요인으로 작물화가 늦어지고 가축화할 동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수렵채집은 그들 나름대로 오랜 기간 동안 현지에 적응하면서 고착화된 삶의 방식인 거죠.

이를 잘 받아들이거나 자생적으로 작물화한 중국은 1인 통치하의 세계최강국으로 오랫동안 군림하다 나태함에 빠져 유럽과 일본에 굴욕을 당합니다. 중국은 알다시피 화약과 나침반, 종이, 인쇄술 등 정복의 직접적인 요소들을 발명한 나라죠.

반면 후발주자였던 유럽은 지중해성 기후를 이용해 식량을 증산하고 여러 국가와 왕조가 서로 경쟁하거나 벤치마킹을 하면서 무기와 물리‧화학을 발전시켜 신대륙 진출 이후 빠르게 세계를 정복합니다.

일본과 중국의 흥망성쇠를 이야기 했으니 그 사이에 낀 한반도로 눈을 돌려봅니다.

포르투갈, 에스파냐는 이베리아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살려 15세기부터 대항해의 선두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정치적 안정과 리더십이 받쳐줬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인데도 19세기 강제개항 시기까지 ‘은자의 나라’(The Hermit Nation Corea)로 은둔생활을 고집합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전차를 겨냥한 이동식 37㎜대전차포.
한 어린이가 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개인화기를 관찰하고 있다.

 

한반도 바닷길 막는 일본열도와 치명적 관계

외적인 큰 원인은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일 겁니다. 일본열도는 우리나라로 불어 닥치는 태풍을 막아주지만 태평양 해양 진출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남중국해양 루트로 눈을 돌려볼만한데 해류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듯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조선이란 나라는 바다 건너 외부하고는 시종 단교로 일관합니다. 일부 표류해온 외국인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아둡니다. 당연 항해술은 제자리걸음일 수밖에요.

얼마 전 목포에서 배로 두 시간 거리인 흑산도로 자전거라이딩을 간 적이 있습니다. 섬 남동쪽에 다다르자 유배문화공원이 나타납니다. 흑산도로 가는 뱃길은 섬이 몰려있는 다도해지역 비금도를 지나면 파도가 거세집니다. 두 시간 중 1시간은 잠잠한 근해를 순항하지만 나머지 1시간은 드센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조선시대 돛단배로 흑산도에 살아서 도착한다는 건 천운에 맡겨야했을 겁니다.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는 건 가다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임진왜란이란 호된 전란을 겪은 조선조정이 바다를 생각하는 인식은 거기까지입니다.

결국 무력에 의해 개항을 하고 일본에 강제 합병된 이후 8.15해방과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에서 자력에 의한 성장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일본이 페리함대에 문호를 활짝 연 시점과 비교하면 우리는 1세기나 늦게 근현대사를 시작한 셈입니다. <계속>

김형규  tjk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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