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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 이전·이후, IMF 이전·이후
  • 김형규
  • 승인 2017.06.2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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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의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 <4>슈퍼볼과 박세리·박찬호
뉴올리언스 시내 중심에 건립된 슈퍼돔. 지금은 벤츠자동차회사의 후원으로 경기장 명칭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는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급인 ‘재즈’의 발상지라는 점과 유형문화재급인 프로축구(NFL) 세인츠 홈구장인 ‘슈퍼돔’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뉴올리언스 국제공항 이름을 루이 암스트롱 공항으로 부를 정도로 자긍심이 강합니다.

재즈와 슈퍼돔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항상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상황을 설명할 때 흔히 ‘IMF 이전과 이후’로 나눕니다. IMF는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 걸쳐 가혹한 변혁을 강요했습니다. 2005년 뉴올리언스에 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IMF와 비슷합니다. 경제가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재산을 잃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으니까요.

‘유타 재즈’는 뭐지?    

재즈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는 프로농구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홈구장.

재즈는 뉴올리언스만의 로컬음악이 아닌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퍼져나간 대중예술장르입니다. 뉴올리언스가 재즈 메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합니다만 “근데 왜 유타 재즈야?”라는 질문에는 꽁지를 확 내립니다.

유타주(州)의 프로농구팀은 재즈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데 ‘재즈’라는 애칭을 씁니다. ‘비빔밥’의 본고장이 전주라는 걸 누구나 아는데 다른 지방 스포츠 팀이 애칭을 ‘비빔밥’으로 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솔트레이크시티가 연고지인 유타 재즈는 원래 1974-1979년까지 뉴올리언스에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구단 명칭이 ‘뉴올리언스 재즈’였습니다. 문제는 뉴올리언스 재즈 구단주가 1979년에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티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발생합니다. 당연 ‘재즈’라는 애칭은 물려주고 떠나야 하는데 유타 구단주가 재즈를 고집하면서 지금에 이릅니다.

슈퍼돔마저 재해에 속수무책 

세인츠구단은 2006년 팀이 카트리나 재해 이후 첫 복귀경기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결정적 장면을 조형물로 기념하고 있다.

유타 재즈 이전 이후 장시간 프로농구단이 없었던 뉴올리언스는 2002년 샬럿 호네츠가 뉴올리언스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뉴올리언스 호네츠라는 이름으로 활기를 되찾는 듯했지만 카트리나가 홈구장을 수마로 뒤덮는 바람에 또 한 번 위기를 맞습니다.

뉴올리언스 호네츠는 2년간 오클라호마에 임시구단을 차리고 더부살이를 하다 되돌아오지만 카트리나의 후유증으로 지역경제가 피폐되고 주요 고객이던 흑인 관중들마저 급감하자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팀을 매각하게 됩니다.

이후 NBA사무국이 임시로 팀을 운영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같은 지역 NFL 뉴올리언스 세인츠 구단주이자 중고차 매매의 큰손인 존 벤슨이 농구단을 인수해 현재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존 벤슨 구단주는 농구단 인수 후 유타 구단으로부터 ‘재즈’를 되돌려 받길 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뉴올리언스의 시조(市鳥)인 펠리컨을 마스코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뉴올리언스에서 프로농구단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식축구(NFL) ‘뉴올리언스 세인츠’ 때문이죠. 고래등이 너무 커 새우등이 견디기 힘든 겁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식민지 덕에 가톨릭 신자가 많아 ‘세인츠’라는 애칭을 사용할 정도로 지역 색이 강한 팀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이 재즈 풍으로 즐겨 불렀던 노래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에서도 구단 명칭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슈퍼돔 광장에 조성된 다양한 기록물.

프로농구단에 ‘재즈’를 외치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는 지역민들의 아쉬움이 오죽하겠습니까.

화려하기만 했을 것 같은 뉴올리언스 세인츠도 카트리나라는 사상초유의 재난으로 눈물겨운 갱생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세인츠의 홈구장인 슈퍼돔 광장에는 미식축구선수 두 명이 맞대결을 펼치는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사진을 먼저 찍고 나서 귀국 후 이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단순한 조형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슈퍼돔은 1975년 건립됐습니다. 무려 7만 3200여석 규모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장한 대형실내경기장입니다. 당시 옥외 천연잔디축구장 하나 없었던 우리나라 실정을 감안하면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만합니다.

뉴올리언스는 물론 미국의 자랑이었던 슈퍼돔 역시 카트리나의 강풍에 지붕이 날아가고 내부시설이 파괴되는 수모를 당합니다. 연방정부는 이곳을 임시 이재민 수용소로 활용하고 복구에 들어갑니다. 안방을 잃고 졸지에 홈리스가 된 세인츠의 팀 성적은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었죠.

1년여 후 2006년 9월 25일 간신히 응급복구를 끝내고 세인츠가 슈퍼돔에서 첫 복귀경기를 펼치던 날 홈팬들은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입니다.

영원한 라이벌 애틀랜타 팰콘을 맞아 세인츠 선수 스티브 글리슨이 1쿼터에서 상대의 킥(PUNT)을 상상도 못할 블록으로 막아내자 이 공을 곧바로 동료 커티스 데로치가 장거리 터치다운으로 연결시킵니다.

초반 승기와 홈 관중의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어 세인츠는 23-3으로 크게 이깁니다. 글리슨의 블록 순간이 바로 슈퍼돔 앞 광장에 세워진 조형물입니다. 작품 제목이 ‘부활(Rebirth)’입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 박동이 빨라집니다.

세인츠와 박세리 박찬호

슈퍼돔 맞은편 챔피언 스퀘어에는 세인츠 구단주 벤존슨과 쿼터백 드류 브리스가 2009년 슈퍼볼 우승후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장면을 전시하고 있다.

세인츠는 여세를 몰아 3년 후인 2009년 쿼터백 드류 브리스를 앞세워 전 세계 최고의 스포츠 잔치인 슈퍼볼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카트리나로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뉴올리언스 시민들에게 슈퍼볼 우승소식은 벅찬 감격과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우리에게도 IMF의 경제위기를 겪는 와중에 박세리‧박찬호라는 걸출한 스포츠 스타가 국민들에게 작은 위안을 안겨줬었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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