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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의 야마토 로드와 모리카미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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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의 야마토 로드와 모리카미 정원
  • 김형규
  • 승인 2017.09.0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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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의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 <10>미국과 일본의 끈끈한 우정 파헤치기
야마토로드를 따라 가면 모리카미 정원이 나타난다. 모라카미 정원의 입구.

미국 플로리다 동쪽 95번 고속도로를 타고가다 델레이 비치(Delray Beach)를 지나 보카 러튼(Boca Raton)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수상쩍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나오는 야마토 로드(Yamato Road) 안내판입니다.

야마토(大和)는 일본 고대 4-5세기 경 위세를 떨친 통일정권을 말합니다. 이역만리 태평양 건너 플로리다 반도에 야마토라는 일본 도로명이 있다는 점이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더군다나 야마토로드를 따라 더 들어가니 모리카미 파크 로드(Morikami Park Road)가 나타나고 그 끝자락에 ‘모리카미 뮤지엄 & 저팬 가든’이라는 대규모 일본식 정원이 나타납니다. 이곳의 홈페이지 주소(www.morikami.org)에 ‘org’가 따라붙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미국에는 이런 규모의 일본식 정원이 여러 군데 있다고 합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이후 외국에 사는 일본인들은 대놓고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음지에서 움직이는데도 미국이 고대 정권 명칭을 딴 도로이름을 허락할 정도로 일본의 영향력은 막강한 모양입니다.

플로리다에 웬 일본 거리 이름이 

일본색이 짙은 대나무숲 정원.

모리카미 정원의 기원은 1906년 20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미국 플로리다에 이주한 조지 S. 모리카미로부터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파인애플 농장을 시작한 그는 이후 많은 일본인을 받아들여 집성촌을 형성했습니다. 농장주로서 성공한 그는 1960-70년대 플로리다주정부에 농경지를 농업연구용으로 기부하고 나머지 일부 부지를 일본식 정원으로 가꿔 공원으로 유료개방하고 있습니다.

일본생활문화를 미국에 알리는데 앞장섰고 특히 분재(盆栽)는 미국인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식 거리명은 그가 미국사회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보답입니다.

플로리다에 첫발을 디딘 모리카미 기념물.

모리카미가 미국으로 건너온 1906년, 그러니까 20세기 전후 일본과 주변국의 사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위안부, 독도영유권, 강제징용 등 한반도를 강제 합병한 이후 만행에 대해 사죄는커녕 역사를 은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요. 청소년기와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학교에서 배우거나 주워들은 상식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 일본은 미개하고 보잘 것 없는 왜구에 불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제, 고려,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는 늘 일본을 가르치고 달래는 은인이었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했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운명을 바꾼 조총의 전래

다다미방을 소개하면서 신발을 벗고 실내에 들어가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다.

1543년 일본 규수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 상인이 탄 상선이 표착합니다. 이 상선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인에 의해 일본에 조총이 전해집니다. 일본이 조총 만드는 기술을 획득하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게 됩니다.

조총 전래로만 끝난 게 아니라 일본이 낯선 포르투갈인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조총 값을 후하게 쳐주고 돌려보낸 이후 서양과의 문물교류에 활기를 띱니다.

반면 조선은 1세기쯤 뒤 네덜란드인 박연과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해 교류의 기회를 잡았는데도 허무하게 날려버립니다. 조선은 이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억류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박연은 생몰시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이슬처럼 사라졌고 하멜은 모진 고초를 겪다 겨우 탈출에 성공해 조선에서의 불행했던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미국에서 인기를 끈 분재전시구역.

조총으로 중무장한 일본을 1590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감을 얻어 2년 후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당시 세계최강 명나라와 한판 붙기 위해 길을 비켜달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꼴이 엉망이 됐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청이 들어섰는데도 주변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국격이 추락할 대로 추락합니다.

기독교 전파와 상공업의 과도한 팽창을 우려한 일본도 1635년 쇄국령을 발령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외국과 문물교류를 허락합니다. 폐쇄령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때까지 교류를 통해 상공업과 과학기술 수준을 상당부분 끌어올려놓습니다.

쇄국령 해제 직후 메이지유신 단행

일본인들의 플로리다 이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

17-19세기 중반까지 뉴턴의 만유인력, 와트의 증기기관 완성, 나폴레옹의 등장 등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 주류무대에 등장하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됩니다.
미국도 독립선언문을 채택하고 루이지애나를 매입하는 등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기지개를 켭니다.

일본은 쇄국령 속에서도 장기간 계속된 평화 덕에 농업과 상공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도시가 형성되고 유통망과 금융업까지 활성화되는 등 미래에 대비합니다.

1853년 미국 페리함대가 증기선을 몰고 도쿄 외항에 도착해 개항을 요구하는 사건은 일본의 운명에 중요한 전기를 가져다줍니다. 검은색의 증기선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조총을 처음 봤을 때처럼 두려움과 함께 서구 문물에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정원 안에 일본전통가옥을 건립해 각종 생활양식을 안내하고 있다.

일본은 1850년 터진 아편전쟁에서 영국의 증기선 몇 척에 청나라 정크선 수백 척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을 겁니다.

일본은 미국과 불평등개항조약을 맺었지만 속으로는 장차 서양을 앞지를 야욕을 키웁니다. 미국도 일본을 만만히 보지는 않은 듯합니다. 일본과 아시아를 사이좋게 나누고 상의할 정도로 존재가치를 인정했나봅니다.

쇄국령 해제에 대한 찬반양론을 정리하고 천황중심의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일본은 곧바로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메이지유신체제에 들어섭니다. 수많은 인재를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 정치제도와 과학기술, 법률 등을 배우도록 한 거죠.

일본은 이미 웬만한 외우내환 정도는 견딜만한 국력을 갖췄기에 메이지유신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세상 뒤집힌 줄도 모르고 조선은 이때도 일본을 신발밑창 껌 딱지 보 듯합니다.

국력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우리나라와 중국에 군침을 흘립니다. 임진왜란 때 못 이룬 대륙정벌의 야욕을 다시 드러낸 겁니다.

후손들이 일본을 잊지 않도록 교육도 중시했다.

남의 것을 탐하는 그릇된 욕망을 갖게 된 건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판단됩니다. 침략 수법도 미국과 유사합니다. 앞서 6편 ‘하와이 마지막 여왕의 ‘알로하오에와 명성황후’에서 언급했듯이 1895년 1월 하와이 왕비가 미국계 세력에 의해 강제로 퇴위된 그해 10월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됩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875년 일본은 강화도 앞바다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들이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해 강제로 개항한 것처럼 영국에서 수입한 증기선 운요호를 앞세워 무력시위를 한 뒤 강화도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본과 미국의 밀월 관계는 모리카미가 미국에 건너오는 시점에 최고조에 달합니다. 1905년에는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을사조약이 강제로 이뤄지고 필리핀과 대한제국을 미국과 나눠 갖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됩니다. 러일전쟁 승리 후 미리 일본과 입을 맞춘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조약이 공표됩니다. 일본은 앞서 청일전쟁에 승리한 이후 미국의 코치를 받아 조약을 맺습니다.

이밖에 텍사스공화국 등 영토확장 과정에서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을사5적 등 친일파를 앞세워 한일합병을 찬성토록 한 것도 유사합니다. 미국이 백인우월주의를 앞세워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냈던 것처럼 일본도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일본인의 우수성을 노골적으로 과시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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