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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의 플랜테이션과 '군함도'의 조선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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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의 플랜테이션과 '군함도'의 조선 노예
  • 김형규
  • 승인 2017.07.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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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의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 <7>케이준, 아프리카 추장 그리고 친일파
플랜테이션 노예들이 기거했던 남루한 오두막.

뉴올리언스의 ‘크레올’(Creole)이나 ‘케이준’(Cajun)이라는 용어는 요즘 크게 구분을 짓지 않는 문화의 한 줄기로 보는 듯합니다.

좀 더 따지고 들어가면 크레올은 다양한 인종의 문화가 혼합된 음악(일례로 King Oliver’s Creole Jazz Band)에서, 케이준은 ‘케이준소스’처럼 음식문화에 독특한 양식을 구축한 듯 보입니다.

1803년 미국이 루이지애나를 매입할 무렵 뉴올리언스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대륙을 놓고 유럽 열강들이 툭하면 전쟁을 선포하는가 하면 일확천금을 꿈꾸는 유럽인들이 속속 아메리카에 정착합니다.

생굴은 프랑스국민이 보양식으로 즐기는 음식이다. 우리나라 굴보다 약간 크고 초고추장처럼 보이는 붉은색 소스가 루이지애나 소스다.
로오이스터는 루이지애나소스와 마늘버터에 얹어 먹는다.
프랑스식 빵, 케이준 옥수수를 곁들인 뉴올리언스식 해물덥밥.

내환이 깊었던 프랑스도 16세기부터 해외식민지 개척에 나섭니다. 선봉주자인  자크 카르티에가 북대서양을 건너와 발견한 땅이 지금의 캐나타 동부해안 아카디아(Acadia)일대입니다. 날씨가 춥고 이렇다 할 자원은 없지만 다행히 해류가 좋아 프랑스 이민자들이 어업에 종사합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식민지영토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프렌치 인디언전쟁(1756-1763)에서 영국에 패함으로써 캐나다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이때 일부 프랑스 이민자가 모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 소유였던 뉴올리언스와 아이티 등지로 이주합니다. 케이준(Cajun)의 시초입니다.

잠발라야는 나가사키 짬뽕의 원조(?)

잠발라야는 해산물, 고기, 야채, 밥을 함께 넣고 요리한 볶음밥이다.

케이준들이 캐나다 생활부터 부유하게 산 건 아닙니다. 이민개척이 그렇듯 그곳 자연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했고 타의에 의해 뉴올리언스로 이주한 이후에는 더욱 어려운 환경에서 직면했습니다.

케이준이 주로 해안가에서 거주해서인지 해산물 요리가 많습니다만 매콤한 케이준소스를 앞세운 파파이스는 세계적인 치킨체인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뉴올리언스에서 맛본 케이준 요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잡탕요리인 부대찌개와 짬뽕밥을 연상시켰습니다. 기본양념이 너무 달라 맛과 향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를 몽땅 집어넣고 조리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뉴올리언즈의 대표 음식 검보. 닭고기 등 육류와 새우, 야채, 토마토, 쌀 등으로 만든 수프.
이곳 사람들이 간식으로 즐겨 먹는 새우와 가재찜.

한편 미시시피강 인근에는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 굴비처럼 엮여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동력을 배경으로 사탕수수 등을 경작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곳곳에 자리 잡습니다. 이전까지 미시시피강 일대가 프랑스 소유였기에 플랜테이션의 농장주는 프랑스 이민자가 많았겠죠. 직접 방문했던 ‘로라 플랜테이션’의 창업자도 ‘기욤 뒤파르크’라는 프랑스인입니다. 프랑스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으로 줄행랑을 쳤다는데 여기서 다룰 소재는 아닙니다.

플랜테이션의 조직은 농장주와 농장주 가족이 갑(甲), 나머지 흑인노예들로 구성된 노동자들이 을(乙), 이렇게 이원화돼 있을 것 같지만 다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갑과 을 사이에 크레올(Creole)이라는 계층이 등장합니다.

크레올에 대한 어원은 에스파냐어까지 파고들 것 없이 외국으로 이민 간 교포 2세대 이후쯤으로 보면 됩니다.

해물과 생굴 중심의 케이준요리로 유명한 뉴올리언스 하버레스토랑.
하버레스토랑 메뉴. 케이준의 요리답게 악어, 거북이, 개구리 식재료가 눈길을 끈다.
해물, 소시지, 고기 꼬치구이 덮밥.

추론을 해보자면 1800년대 초 뒤파르크가 뉴올리언스에 정착해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기로 합니다만 낯선 이국땅에서 노예들을 통솔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언어 소통은 물론 현지 환경도 모르고…. 뒤파르크는 앞서 이주한 프랑스 동포 중에 노예들과 소통이 가능한 크레올을 현장감독으로 고용했을 겁니다.

로라 플랜테이션의 가이드 설명 중에 갑을 관계가 “매우 밀접했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플랜테이션 현장에는 1808년 뒤파르크 농장에 작성 고시된 노예 명부를 볼 수 있습니다. 지명수배전단처럼 몸값과 성격‧능력까지 등재됐는데 가격은 현재가로 환산했습니다. 명부를 잘 살펴보면 ‘매우 밀접했다’라는 표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예 몸값 1억 2000만원

1808년 플랜테이션에서 혹사당하는 노예의 이름, 나이, 특기, 성향, 몸값이 기록된 노예명부.

가장 비싼 몸값의 노예는 장 피에르라는 25세 남성노예로 10만 달러(한화 1억 1000만원)입니다. 크레올과 물라토의 혼혈입니다. 물라토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을 말합니다. 장 피에르의 몸값은 다른 노예에 비해 월등히 높은 만큼 ‘훌륭한 일꾼’(good worker)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밖에 나이와 출신성분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납니다만 나이가 젊어도 ‘도망가려 한다’거나 ‘일을 싫어한다’는 노예는 가격이 많이 떨어집니다. 가격이 낮은 노예는 대부분 아프리카와 남미의 순혈입니다.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갓 잡혀왔을 확률이 높으니 고향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혼혈인 경우 아버지는 백인이거나 크레올입니다. 장 피에르의 몸값에는 크레올의 피가 흐른다는 점이 감안이 됐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노예의 굴레는 벗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크레올의 범위는 혼혈에게 적용되기도 합니다.

플랜테이션에서 현장감독을 했을 일부 크레올의 영향력은 노예들의 생사여탈권을 쥘 정도로 막강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가 대지주에게 어떻게 보고하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노예, 또는 그 가족의 운명이 갈리니까요. 현장감독은 노예들의 고혈을 쥐어짜면서 자신은 대지주에 더 가까운 자본가편이라 거들먹거렸을 겁니다.
‘밀접했다’라는 의미는 일단 휴머니즘과는 관계가 거의 없는 단순한 가계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본‧무력 앞에 동족 팔아 넘겨

뉴올리언스 대표 맥주 앰버.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뉴올리언스의 경제력은 나중에 노예해방을 외치고 나온 북부지역과 심한 갈등 끝에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이어집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처음에는 유럽의 노예장사꾼들에 의해 사냥 당하듯 포획돼 끌려왔습니다. 장사꾼들은 이후 부족의 추장을 금품으로 매수하거나 겁박해 동족을 넘기도록 잔머리를 굴립니다. 직접 피는 안 묻히겠다는 거죠.

아프리카 땅에서 원주민이 살아남기 위해선 1차 선별권을 가진 추장에게 잘 보여야 했음은 당연했겠죠. 일부 부족은 다른 부족을 노예로 대체하기 위해 무자비한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입니다.

억울하게 끌려와 모진 노동에 시달린 노예들 가운데는 운 좋게 주인을 잘 만나서 - 아마도 밀접한 관계의 백인이나 크레올의 배려(?)에 - 스스로 노예를 소유하는 자유인이 되기도 합니다만 극소수에 불과했을 겁니다. 대다수 한평생 농장의 헛간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비참하게 일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군이 위기에 몰렸을 때 전세를 뒤집은 계기는 남부 농장에서 도망쳐 나와 북부군에 가입해 죽기 살기로 싸운 흑인 노예들 덕이 컸습니다.

노동착취와 희생만 강요당했던 그들과 후손에게 남겨진 것은 인종차별과 빈곤입니다. 플랜테이션의 전신인 ‘아시엔다’ 때문에 무수히 끌려온 아이티 등 카리브해 국가의 노예 후손들은 더욱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강제 징용의 어두운 그림자 친일파

최근 개봉한 영화 ‘군함도’(軍艦島)가 눈길을 끕니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항 인근의 섬입니다. 지금은 무인도지만 19세기 후반 전범 기업 미쓰비시가 탄광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아프리카 노예처럼 강제 징용당한 지옥의 섬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군함도 포스터.

플랜테이션의 악덕 감독이나, 동족을 노예로 팔아넘긴 비열한 아프리카 추장처럼 우리에게도 동족을 군함도에 팔아넘긴 친일파 앞잡이들의 사탕발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만큼 동족을 팔아넘긴 친일파에 대한 단죄의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는 이유는 해방이후 제대로 된 일제 청산과 단죄, 자기반성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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