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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통에 들어간 흥선군[인터넷 소설 이하응 : 리멤버 1863] <2>객줏집 소동
삽화=태도(太道) 조석희

역관 오경석은 조선에 돌아오는 내내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거대한 중국조차 하염없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그였다. 조국의 앞날이 걱정되어 조바심을 내며 조선으로 돌아왔다. 대동강을 건너면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봤다. 흥선군! 그래, 흥선군이 있었어! 그가 조정에 등용되어 조선의 개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평소에 몇 번의 왕래가 있었다. 기껏해야 난초 그림 몇 장 받고 여인네들 백화분 한두 개 건네는 정도지만 말을 하는 품새나 사용하는 용어에서 남다름을 보았던 터였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관상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라니! 필부의 언변에도 미치지 못하는 막돼먹은 자의 언사가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멀 수가 없었다.

사랑에 처박혀 점심도 저녁도 거른 채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몇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낸 오경석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체류하다가 북경에 온 헐버트(H.B Hulbert)가 떠오른 것이다.

헐버트는 흥선군을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귀족으로 조선 정치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라고 평가했다. 매사에 반항적이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관철해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지금에서야 헐버트의 이야기를 기억해내다니. 오경석은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했다. ‘허허, 그 머리 좋은 종친이 나를 놀린 게야, 맞아 그랬어… 나를 속인 게야. 무서운 양반일세….’ “하하하” 오경석이 자신도 모르게 유쾌하게 웃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생긴 기분이었다. 
 

흥선은 담뱃대를 문 채 오랜만에 두 아들이 글 읽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자식 공부에 유달리 집착하는 그다. 글 읽는 운율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들며 대견하다는 듯 아들들을 뒤편에서 바라보고 있다.

시고 맹자왈 부자유친 군신유의(是故 孟子曰 父子有親 君臣有義)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인이불지유오상 칙기위금수불원의(人而不知有五常 則其違禽獸不遠矣) 천지지간만물지중 유인최귀 소귀호인자 이기유오륜야(天地之間萬物之中, 惟人最貴.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니라.
 
흥선이 기침을 하며 두 아들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 뜻인지 설명할 수 있겠느냐. 재선이가 해보아라.”
“예 아버님.” 큰아들 재선이 대답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다섯 가지 인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맹자께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친애(親愛)함이 있어야 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義理)가 있어야 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 남편과 아내 간에는 분별이 있으며, 장유유서(長幼有序)라 어른과 어린이 간에는 차례가 있어야 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친구 간에는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인이부지유오상 즉기위금수불원이라(人而不知有五常, 則其違禽獸不遠矣) 사람이 되어 이 다섯 가지 떳떳한 도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면, 날짐승과 들짐승과 다름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흥선이 아들의 똑 부러진 해설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묻는다.
 
“맹자께서 다음에 또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느냐.”
“예 아버님. 연즉 부자자효 군의신충 부화부순 형우제공 붕우보인 연후방가위지인의(然則, 父慈子孝, 君義臣忠, 夫和婦順, 兄友弟恭, 朋友輔仁, 然後方可謂之人矣)라.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임금은 의롭고 신하는 충성하며, 남편은 온화하고 아내는 순종하며, 형은 우애롭고 아우는 공손하며, 친구들은 서로 어짊을 갖추어야 비로소 그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옳거니 다음은 명복이가 해보아라.” 재황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예, 아버님. 장유 천륜지서 형지소이위형 제지소이위제 장유지도소자출야(長幼, 天倫之序. 兄之所以爲兄, 弟之所以爲弟, 長幼之道所自出也)라. 어른과 어린이는 천륜의 질서이고 형이 형 되는 이유와 아우가 아우 되는 이유는 어른과 어린이의 도리가 생겨난 근원이라고 하셨습니다.”
흥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재황이도 제법 공부가 깊었구나.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서 있을 수 없고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멀리 갈 수 없는 법이다. 과시하는 사람은 밝게 빛나지 않고 자랑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며,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존경받지 못하고 뽐내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너희들은 왕의 종친이며 이 나라를 세운 분의 자손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리하나 찌르지 않고, 곧으나 분열시키지 않고, 빛나나 눈부시지 않아야 한다. 알겠느냐.”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흥선이 귀를 쫑긋 세우고는 소리쳤다.
“게 누구냐”
“아유 저올시다.”
민씨 대부인이었다. 손에 다과를 담은 쟁반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밖에서 듣고 있자니 부자지간에만 깨가 쏟아지니 샘이 나서요.”
“어서 오시오, 부인.”
재선과 재황이 일어나 반긴다.
“어머님, 어서 오십시오”
“그래 너희들도 앉아라. 양반집엔 담 밖으로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질 않아야 한다잖아요.”
흥선이 흐뭇한 얼굴로 대답한다.
“말해 뭐 해요. 이게 다 부인 덕분이요.”
민씨 부인도 바로 한마디 한다.
“아이고, 서방님이 알아주시네요. 대감 저도 가끔은 바라봐 주세요, 섭섭합니다.”
“왜 내가 부인에게 관심이 없겠소이까, 그래 요사인 어떤 책을 읽고 계시오.”
“저는 요사이 서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호라 서학이라, 나도 가끔 보기는 하오만…”
그러자 큰아들 재선이 묻는다.
“아버님 서학이 무엇이옵니까?”
“으흠, 양이들이 믿는 천주학을 말하는데 너희들은 아직은 보지 말아라.”
“예, 아버님.”
흥선은 부인을 바라보며 한마디 던진다.
“부인, 식객들은 잘 챙기십니까?”
 “예, 넉넉지는 않습니다만 근근이 꾸려나가고 있답니다. 염려 마세요.”
“부인이 애쓰시오. 한데 갈수록 집안의 가세가 기우니 이를 어쩌오.”
“대감은 너무 괘념치 마세요. 안살림은 제가 어떻게든 꾸려 나갈테니.”
흥선은 부인 민씨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고맙소이다.”

다음 날 아침, 고대광실 앞에 흥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동김씨 수장 김좌근의 첩실인 나주 양씨 나합(羅閤)의 대문 앞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청탁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흥선군도 줄을 섰다.

드디어 흥선 차례가 되었다. 한 손에 붓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장부를 든 청지기가 거만한 태도로 묻는다.
“댁은 뉘 시오?”
“종친부 유사당상 흥선군이라 이르시게.”
“종친부에 유사당상이라… 근데 어쩐 일이시오?”
흥선은 아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배알이 뒤틀린 것이다. 그러자 그자가 다시 묻는다.
“아, 여보시오. 용건이 뭐냐 이런 말이지.”
흥선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듯 말했다.
“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아, 그러셔요. 그 말 나한테 하고 가시오.”
“어허, 이 사람이… 그건 아니 되네. 둘이서 꼭 할 말이 있으이.”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눈을 달고서도 모르시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두 나합(羅閤) 나리를 만나겠다는 건데, 양반이라는 사람이 그리 눈치가 없소.”
“네, 이놈. 아무리 갓끈 떨어진 양반이라도 근본이 있는 법이거늘. 왕의 종친을 이리 함부로 대하다니… 네놈이 정신이 있는 게냐.”
이때 안에서 나주 양씨의 소리가 들린다.
“이 서방, 왜 이리 시끄러운가. 그 양반 들이게나.”
청지기가 흠칫 놀라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예에, 마님” 하며 안내를 거든다.
“어서 들어가시오.”
흥선군은 “어험” 헛기침을 하며 청지기를 아래위로 째려보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흥선군이 나주 양씨의 사랑방에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주 양씨를 보고는 기분이 좋아진 듯 흥선이 호기롭게 인사를 건넨다.  
“잘 계셨는가.”
“아이고, 이게 웬일이신가요. 조선의 제일 높으신 종친부 어른이…”
“어허 이 사람아, 옛정을 생각해서 너무 그러지 마시게.”
“하기야 제 머리를 처음 올려 주셨지…”
흥선이 얼른 말머리를 빼앗으며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그때 참 좋지 않았어, 응?”
“예에, 기억하고말고요. 그 알량하신 임금의 종친을 잊을 리가 있나요. 일신의 부귀영화를 왕족에게 의탁해 혹여 숙의 마마라도 되어 보려던 제가 어리석었지요.”
흥선은 그저 바라볼 뿐 대꾸가 없다.
“그래, 오늘은 또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흥선이 옷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사실 말일세… 하옥 대감이 만나주질 않는다네.”
“아니, 그 알량한 난초 그림 몇 장 안기고 허구한 날 돈을 뜯어 가면 누가 좋다고 하겠소.”
흥선이 겸연쩍게 쳐다본다.
“그래서, 나보고 그걸 사라? 그 얘기 하자고 왔소?”
그래도 헛기침만 해대는 흥선이 안타깝고 답답했던지 나주 양씨가 한마디 더 한다.
“아이고, 꼴에 아니꼬운 모양이네. 아니면 속 뒤집히는 걸 참는 게요? 하기야 요즘 종친들 입만 뻥긋하면 잡아다가 사약을 내리는 판이니 비렁뱅이보다 나을 게 없을 테지…”
나주 양씨가 혀를 찼다. 그러자 흥선이 애걸하듯 불쌍하게 말한다.
“어허 이 사람아, 마음을 좋게 쓰시게나.”
“어이구 이 화상…”
나주 양씨가 보료 옆에 놓여 있는 궤짝을 연다. 그리고는 엽전꾸러미를 꺼내 흥선 앞에 던진다.
“종친 어른, 이걸로 나도 이제 끝이요. 내 앞에는 얼씬도 마세요.”
흥선은 엽전꾸러미를 보자마자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집어 허리춤에 꿰찬다.
“잘 쓰겠네.”

방을 나가는 흥선의 뒤에 나주 양씨가 한마디 덧붙인다.
“잘 쓰시오. 어느 년 치마폭에 던져줄진 몰라도…”
“하하, 그럴 테지. 어쩌겠나, 이리 생겨 먹은걸.”
흥선은 나주 양씨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뒤돌아섰다.

나주 양씨 집에서 나온 흥선이 안국동 집으로 향한다. 한참을 사랑에서 뒹굴더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흥선이 도달한 곳은 종로 난전 근처 춘홍의 객줏집이다. 전국의 보부상들이나 거간꾼이 장사를 마치고 모이는 곳이다.
 
많은 사람이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술을 마시는 장면은 오늘도 어김없다. 다른 한쪽에 호기롭게 술 마시며 유난히 객기를 부리는 무리도 보인다. 무리 안에는 여동생이 궁궐 상궁이나 나인으로 있는 천하장안도 있다. 흥선군은 한양 땅 어느 술집에나 빠지지 않는다는 별호가 붙은 지 이미 오래다. 술만 취하면 미친개처럼 악악거리며 시비를 거는 것이 일상임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오늘도 흥선군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곧 불콰해진 흥선이 좌중을 압도한다.
“자자, 마시게들. 이게 얼마 만인가. 오늘은 내가 한턱 아니라 몇 턱이라도 낼 터이니 실컷 마시게들.”
술꾼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온갖 아부를 떨어댄다.
“어르신, 잘 알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역시, 종친이라 그러신지 배포가 크십니다.”
이 말에 객줏집이 파안대소로 흔들흔들하다. 천희연이 술병을 들어 귓가에 흔들어 보이더니 흥선을 바라본다.
“대감 어른, 술이 그만 떨어져 버렸네요.”
흥선이 딸꾹질을 하더니 흥에 겨운 듯 받아친다.
“그럼 더 시켜야지, 이 사람아!”
이를 바라보던 안필주가 벌떡 일어서더니 큰소리로 주인장을 부른다.
“춘홍아, 술 떨어졌다, 술치고 놀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묻혀 안필주의 주문이 묻혀버리고 만다. 그러자 흥선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껏 소리친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흥선이 어깨춤을 추며 춘향전 한 대목을 소리하자 모두가 박장대소한다. 술 시중드는 여인 하나가 다가오자 흥선이 덥석 엉덩이를 덥석 쥐며 소리친다.
“네 이년, 내 소리가 안 들리더냐!”
여인이 엉덩이가 아픈지 비명을 질러 댄다.
“아악! 내 엉덩이가 찹쌀떡이라도 되나, 왜 이리 주무르고 난리야 난리가! 도대체 왜 이리 험하게 굴어요!”
술에 취한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흥선을 쳐다본다. 그러자 건장한 사내가 일어서서 일갈한다. 금군 장교 이장렴이었다.
“대체 웬 소란이냐?”
한걸음에 흥선 앞에 서더니 바로 귀싸대기를 올려붙인다.
흥선이 벌렁 뒤로 나자빠진다.
“어이쿠 나 죽네.”
“나는 금군 장교 이장렴이다. 보아하니 막돼먹은 불한당은 아닌가 싶은데, 혼나고 싶어 작정했구나!”
흥선이 맞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는 대들기 시작한다.
“네 이놈! 대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게냐. 내가 종친부 유사당상인줄 모른단 말이더냐!”
“아니 종친부 유사당상이라면 우리 조선의 상감마마 친척이 아니신가? 설마하니 그런 자가 객줏집에서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설사 그렇다면 더 삼가고 조심해야 하거늘. 썩 꺼지지 못할까!”

한창 술에 취한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이때 옆에 서 있던 장안의 왈패들인 천하장안이 흥선을 거들고 나섰다. 그중 맏형 노릇을 하는 천희연이 택견 자세를 취한 채 이장렴의 앞에 선다.
“네 놈이 힘깨나 쓰는구나. 술 먹다가 그럴 수도 있는 게지 어디에다 손찌검이냐?”
하청일도 거들고 나섰다.
“그러게 말이죠, 성님. 이놈이 배알이 밖으로 소풍을 나왔구먼요.”
장순규와 안필주도 가만있지 못하게 되었다.
“아따 성님, 술 먹고 근질근질하던 차에 몸이나 좀 풀어봅시다요.”
“성님, 이 막내둥이 안필주도 저놈을 작신 밟아서 허리 병신 만들라니까.”

금군 장교 이장렴을 천하장안이 둘러싸자 객줏집에 긴장감이 팽배해진다. 이때 흥선이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나선다.
“그만하시게. 뭘 이런 걸 가지고…”
흥선이 폭소를 터트리자 천하장안이 멋쩍은 듯 뒤로 물러난다. 그런데도 이장렴은 돌아서는 흥선의 뒤에다가 또랑또랑한 서울 말투를 던진다.
“종친이면 종친답게 구시오! 대체 이게 무슨 부끄러운 짓이오!”
흥선은 이장렴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다시 한번 침을 꿀떡하고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화를 참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잠시 후 흥선이 혼자 객줏집을 비틀대며 나섰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곧바로 걷기 시작한다. 아무리 왕족의 위신이 떨어졌다지만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얼마나 더 당해야 사람들이 나를 미친 파락호 취급할까 생각하니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군기시를 지나 조계사 앞을 지날 즈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복면을 한 자가 뒤를 밟고 있었다. 잠시 멈칫한 흥선이 급하게 내달렸다. 골목길에 접어들자 어느새 자객이 칼을 뽑아 뒤에서 내리쳤다. 용케 피한 흥선이 달아난다. 괴한이 기합 소리와 함께 다시 칼을 내리쳤다. 이번엔 흥선이 돌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칼이 목젖을 피해 어깨를 스쳤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잘려나갈 뻔했다. 넘어지면서 손에 쥔 흙가루를 놈의 얼굴에 뿌리고는 복날 개처럼 내달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막다른 골목이다.

어느새 뒤쫓아온 자객이 여기저기를 살핀다. 골목 끝 담벼락에 피 묻은 두루마기가 걸려있다. 사내가 칼을 겨눈 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자 변소가 나타난다. 슬며시 문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흥선은 담을 넘어 도망간 것이 틀림없다. 괴한이 담을 훌쩍 뛰어넘는다.

잠시 후 똥통에서 머리 하나가 올라온다. 흥선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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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태희는 대학로문화발전위원회 기획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행복도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창작공동체 '이도의 날개' 대표로 활동하는 문화예술기획자다. 세종포스트와 함께하는 음악회 '세종에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윤동주'의 총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유태희  naturec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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