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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에 감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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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에 감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
  • 글 유태희 | 그림 조석희
  • 승인 2019.02.0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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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소설 이하응 : 리멤버 1863] <8>철종의 서거

가을이 깊은 날 아침, 흥선이 신재효의 동리정사를 찾았다. 어느새 창학교(唱學校) 사랑방이 흥선의 비밀 회합 장소가 되다시피 했다. 소리 선생 김세종에게 창을 배우는 학생, 각종 악기를 연습하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 가운데서도 흥선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는 단연 진채선과 김중진이다. 김중진은 재미난 말로 사람을 웃기는 전기수(傳奇叟)다. 이가 빠져 노인처럼 입을 오물거려 발음이 부정확한데도 사람들은 김중진을 쳐다보기만 해도 웃음보를 터트렸다. 워낙 소문난 재담가인 데다 장안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마침 김중진이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해 흥선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구경한다.

“쩌기 저… 가설라무네 웃기는 요절복통… 요강에 소변보다가 너무 웃어서 요강 깨지는 소리 하나는 몸풀기로 해볼 테니 들어보것수. 어뗘 반응이 뜨트미지근혀서 섰던 거시기도 들어가것소. 여기 앞에 계시는 여어러분 돈 안 드는 박수는 전라도 말로 째께 쳐주소잉. 안 그라문 경상도 말로 칵마 지박았뿌러, 으이, 안글나.”

공부하던 서생들이 곁눈질하며 웃어댄다.

“흐흠… 전쟁터에 이르자 한 장군이 자기 병졸 가운데 공처가가 얼마나 많은지 보려고 ‘아내가 무서운 자는 붉은 깃발 아래, 그렇지 않은 자는 푸른 깃발 아래 서라’고 하자, 10만 대군 가운데 단 한 사내가 푸른 기를 지켰는데, 그 까닭이 마누라가 사람 많은 곳엔 가지 말라 했다나 뭐라나.”

모두 자지러지게 웃는다. 흥선도 억지로 참으려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크크크”

흥선이 가벼운 기침을 하며 사랑채로 들어서자 진채선이 노래하고 있다. 흥선 시선이 한참을 진채선에 머물다가 김중진에게 향한다. 신재호에게 흥선이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혹 저자가 장안에서 제일가는 전기수인가?”

“예에 그러합니다.”

흥선이 파안대소한다.

“내 저 사람을 쳐다만 봐도 웃음이 나오네그려.”

“그렇습니다. 재주가 특출난 사람입니다.”

“그럼 늘어놓는 사설은 동리가 써주는가?”

“소인도 가끔은 쓰지만… 소리 선생인 저기 저… 대개는 김세중 선생이 씁니다.”

“오호 그렇구먼… 근데 학교를 운영에 어려움이 많을 텐데, 어쩌누?”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됐습니다만…”

흥선이 신재효를 빤히 쳐다본다.

“사내놈이나 어린년이나 가르치는 일이 맘 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지 뭡니까. 계집아이는 더 어렵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기 저 계집이 어제는 막무가내로 고향에 돌아가겠다지 뭡니까. 한참 물이 올랐는데 말입죠.”

“어허, 그렇군. 아직 생기발랄한 나이이니 한군데 박혀 공부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

“예.”

“그래 저 아이가 요즘 배우는 소리는 뭔가?”

“예, 춘향전에 기생점고를 배우고 있습니다.”

“어디 소리나 한번 들어보세그려.”

“그러시지요.”

신재효가 동리정사 마당으로 나가 소리를 배우는 진채선과 전기수 김중진을 데리고 들어온다.

“뭣들 하시는가. 종친 어른께 인사 올리지 않고.”

두 사람이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올린다.

“수고들 많구먼. 전기수 당신은 타고난 재주가 있네그려. 그간 고충이 많았겠지… 그래도 말년엔 복이 많이 들어오겠어… 그래 장안에선 어디서 재주를 펼치시는가?”

“아이고 대감 어른, 말씀을 낮추십시오. 어찌 천한 것에게 존대를 하시나이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이나 저나 한데 어울리면 모두가 통하는 법 아니겠나… 인고의 노력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신선의 경지에 오르는 법, 마땅히 위하고 높여야 하지 않겠나.”

“아이고 대감마님,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광명이 비추는 듯하옵니다.”

이때 신재효가 김중진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김중진이 절을 올리고 자리를 뜬다.

그제 서야 흥선이 진채선에게 말을 건넨다.

“네 선생이 칭찬이 자자하던데 사실이더냐?”

“무슨 말씀이시온지…”

“네 소리가 많이 늘었다던데… 이 귀명창에게 검사 한 번 받을 때가 되지 않았겠느냐.”

“……”

채선이 입을 앙다물고 있자 흥선이 애첩 대하 듯 다정하게 부탁한다.

“내 맘 쓰는 일이 많아 매우 피곤하구나. 네 노랫소리 들으면 좀 나아질 듯한데…”

신재효가 얼근 북을 잡고 진채선에게 눈짓한다.

“요즘 배우는 춘향전 기생점고를 한번 해보자꾸나.”

진채선이 앉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신재효는 그런 채선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어허, 대감마님 앞에서 이게 뭣하는 짓이더냐… 네 년이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흥선이 그만하라는 듯 신재효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허, 동리선생. 왜 그러시나… 싱숭생숭 열아홉 처녀의 맘도 모르시나. 닦달 좀 그만하시게나.”

흥선이 채선을 두둔하는 게 못마땅했던지 신재효가 더 큰소리로 나무란다.

“어서 냉큼 일어서지 못할까.”

그제 서야 진채선이 일어나며 하는 말이 가관이다.

“선생님, 기생점고는 싫습니다.”

“하면…”

“비점가를 하겠습니다.”

신재효가 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허, 비점가를… 그리 해보거라.”

신재효가 북을 다시 잡고 추임새를 넣으니 진채선이 노래를 시작한다.

“눈결에 얼핏 보니, 삼삼이를 덮고 있는 것이 맹랑하고 야릇하다. 생리대를 풀고 과거 시험장에 있는 과녁처럼 잠깐 일어서려무나.

그건 곤란합니다. 그만하고 주무시지요.

이렇게 부탁하는데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춘향이 어쩔 수 없이 반쯤 일어섰다 다시 앉았는데, 몽룡이 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니, 겹겹이 둘러쌓인 푸른 산속이 아니던가. 늙은 중이 송이죽을 자시다가 혀를 데인 형상이요, 홍모란이 반개하여 피어오는 형상이라. 영계찜을 즐기시나 닭의 볏이 거기 왜 있는가? 먹물이 흐른 줄과 도끼자국이 일치하는 구나. 이도령의 움직임 좀 보소. 몸이 점점 달아오르니, 훨훨 벗어 제끼고 모두 벗고 이부자리로 뛰어드는데, 춘향이 하는 말이, 저 보고는 일어서라더니 당신은 왜 안 일어납니까? 이도령이 눈결에 일어서서 앉아있자 춘향이 묻는 말이 검은색을 띠면서, 송이버섯의 머리 같은 것이 무엇시오?

그것도 모르느냐. 동해 바다에서 대합 일쑤 잘 까먹는 소라고둥이라 하는 것이라.

에후리쳐 덥썩 안고 두 몸이 한 몸 되었구나. 네 몸이 내 몸이요, 네 살이 내 살이라. 호탕하고 무르녹아 여산폭포에 돌 구르듯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비점가로 화답한다. 이도령이 춘향의 가는 허리를 후리쳐 담쑥 안고 기지개 아드득 떨며 귓밥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빨면서 주홍 같은 혀를 물고 오색단청 순금장 안에 쌍거쌍래 비둘기같이 꾹꿍꿍꿍 으흥 거려 뒤로 돌려 담쑥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떨며 저고리 치마바지 속곳까지 활씬 벗겨놓으니 춘향은 부끄러워 한편으로 잡치고 앉아 얼굴이 볼그레하고 구슬땀이 송실송실 맺힌다.

비점가의 종장에 이를 때까지 흥선은 진채선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채선이가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다.

“어허, 됐다 됐어. 그만하면 됐다. 아주 흡족하구나. 이리와 앉거라.”

흥선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허허, 피로가 백두산까지 물러갔구나.”

흥선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채선이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흥선의 옆에 와서 앉는다. 하필이면 그때 주위가 갑자기 소란해졌다. 천하장안이 사랑채로 급하게 뛰어 들어온 것이다. 패거리가 부복한 채 맏형인 천일규가 급보를 아뢴다.

“대감 어른, 지금 궁궐에서 급한 전갈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흥선이 다급하게 묻는다.

“무엇이냐, 빨리 아뢰라.”

“예, 지금 전하께서 위중하시다는…

“뭐라!”

천희연이 다시 아뢴다.

“지금 모두 대조전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흥선의 낯빛이 발가스라 해졌다.

“어서 조성하에게 연통을 넣고 무관 이연하와 신헌에게도 알리거라. 너희들은 보부상이나 검계들을 불러모아 여차하면 쓸 수 있도록 준비하고 내가 연락하면 모두 단봉문 앞으로 모이거라.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오백년 종묘사직은 고사하고 멸문지화가 기다리고 있을 게야.  알겠느냐?”

천하장안이 신이라도 난 듯 몸가짐과 언변이 가볍다.

“예, 대감어른!”

“천희연과 하청일은 나를 따르고 자네들은 가는 길에 오경석과 전봉준에게 알려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예.”

흥선이 다시 신재효를 바라보며 이른다.

“천주교도 접장 남종삼을 만나기로 하였는데 그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어주시게.”

흥선이 말을 마치자 모두 일어서 일사분란하게 밖으로 나가 흩어진다.

삽화=太道 조석희

철종의 상태가 심상치않다는 소식에 왕실과 신료들이 대조전에 모여 있다. 깊은 침묵이 모두를 감쌌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복잡한 계산법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고설켜 있을 것이다. 침전에서는 어의가 임금의 맥을 짚고 있고, 조대비와 철인왕후 김씨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다. 나머지는 그 뒤편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다. 조대비가 어의를 바라보며 묻는다.

“어떠하신가?”

어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맥이 너무 약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 마마.”

“뭣이 송구한가, 살릴 수 있는가 없는가?”

“할 수 있는 모든 처방을 시행하였사온데…”

“그래?”

“황공하오나 마마, 오늘 저녁이 고비일 듯하옵니다.”

이때 뒤에 있던 김좌근이 조대비에게 아뢴다.

“대비마마, 우선 종묘사직과 전궁을 비롯해 모든 사찰과 산천의 기도제를 길일을 가리지 말고 실행하라고 전교하심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당장 그렇게 시행하세요.”

김좌근이 깊이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린다.

“예 대왕대비마마, 분부 받들겠습니다.”

이어 조대비가 엄중한 목소리로 승지들에게 명을 내린다.

“지금부터 만조백관은 대조전 밖에서 대기하라 이르시오. 좌의정, 동부승지, 홍문관대제학만 주상의 곁을 지키시오.”

“예, 대비마마.”

모두 일어나 하나둘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김좌근이 좌승지를 통해 조대비에게 긴히 만나기를 청했다.

“대왕대비마마, 영상 하옥대감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옵니다.”

조대비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단호한 말투로 거절한다.

“일 없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전하세요.”

대조전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던 김좌근은 호조참판을 비롯한 측근들과 모여 있다. 임금 사후 묘안이 필요한 김좌근이 좌중을 돌아보더니 운을 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오?”

김좌근의 심복 호조참판이 운을 뗀다.

“어서 차기를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좌근이 눈을 부릅뜬채 언성을 높인다.

“그래 내가 뭐라 했소. 미리 준비하라 그리 일렀거늘…”

호조참판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워낙 춘추가 젊으셔서…”

김좌근이 양 눈썹을 치켜세우며 꾸짖는다.

“시끄럽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김좌근은 아들 김병기를 쳐다보며 말한다.

“만사불여튼튼이라 했으니 금위군대장에게 일러라. 대조전을 몇겹으로 감싸 호위하고 여차하면 모든 출입을 금해야 할 것이야. 전시에 준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그래야지요.”

호조참판이 받았다.

김병기가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연다.

“하오면……”

“그래, 오늘 일에 우리 가문의 명운이 달렸다.”

김병기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는지 의견을 낸다.

“하오면 얼마 전 대사헌 서대순의 상소로 축출되어 강진 신지도로 위리안치 된 경평군 이호를 한양으로 다시 부르심이…”

김좌근이 눈에 핏대를 세우며 아들을 나무란다.

“네 이놈, 진즉 처리했어야 할 일을 지금에서 거론한단 말이냐.”

바로 이때였다. 대조전에서 좌승지가 득달같이 달려나와 쓰러지듯 엎어지며 고한다.

“주상께서 승하하셨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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