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廬山)에서 장쾌한 필치로 선계(仙界)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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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廬山)에서 장쾌한 필치로 선계(仙界)를 그리다
  • 이길구
  • 승인 2018.10.2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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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의 중국 漢詩 기행] <2>李白의 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御虛舟)

중국 한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시인이 있는데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이다. 두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이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본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으로 흔히 ‘이태백’이라고 부른다. 출생과 본적은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촉(蜀) 태생으로, 모친이 꿈에서 태백성(太白星, 금성)을 보고 출산했다는 설과,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이는 아버지 이광(李廣)이 서역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태어났다는 설과 부친이 서역의 부유한 상인이었다는 설이 상존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백의 인물화. 그는 당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시대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며 살아간 천재 시인으로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淸蓮居士)로 ‘시선(詩仙)’이라 불리며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시사(詩史)의 거성으로 추앙받았다.

이백은 스물다섯 살 무렵 촉을 떠나 양양(襄陽), 형주(荊州), 무창(武昌), 금릉(金陵), 양주(楊洲) 등 장강 연안 지역을 유람하며 시 창작의 제재를 얻었다. 그는 안릉(安陵)에서 10년 정도 머물러 살 때 맹호연(孟浩然)과 교류했다.

한평생을 명산(名山)과 자연을 찾아 유람했는데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문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여산의 노래-시어사 노허주에게 부치다>(廬山謠寄盧侍御虛舟)는 이백이 760년(59세)에 야랑(夜郞)으로 추방되었다가 도중에 사면을 받고 강하(江夏:지금의 湖北省 武漢市)로 돌아온 뒤 이듬해 여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이다. 자유롭고 장엄한 시풍을 보인 그는 자신의 시와 잘 어울리는 생애를 보냈다.

아본초광인(我本楚狂人), 봉가소공구(鳳歌笑孔丘).
수지녹옥장(手持綠玉杖), 조별황학루(朝別黃鶴樓).
오악심선불사원(五岳尋仙不辭遠), 일생호입명산유(一生好入名山游).
여산수출남두방(廬山秀出南斗傍), 병풍구첩운금장(屛風九疊雲錦張),
영락명호청대광(影落明湖靑黛光).
금궐전개이봉장(金闕前開二峰長), 은하도괘삼석량(銀河倒挂三石梁).
향로폭포요상망(香爐瀑布遙相望), 회애답장능창창(回崖沓嶂凌蒼蒼).
취영홍하영조일(翠影紅霞映朝日), 조비불도오천장(鳥飛不到吳天長).
등고장관천지간(登高壯觀天地間), 대강망망거불환(大江茫茫去不還).
황운만리동풍색(黃雲萬里動風色), 백파구도류설산(白波九道流雪山).

호위려산요(好爲廬山謠), 흥인려산발(興因廬山發).

한규석경청아심(閑窺石鏡淸我心), 사공행처창태몰(謝公行處蒼苔沒).
조복환단무세정(早服還丹無世情), 금심삼첩도초성(琴心三疊道初成).
요견선인채운리(遙見仙人彩雲裏), 수파부용조옥경(手把芙蓉朝玉京).
선기한만구해상(先期汗漫九垓上), 원접노오유태청(願接盧敖游太淸).

나는 본래 초(楚)나라 광인(狂人)
봉새노래 불러 공자(孔子)를 비웃으며
손에는 초록색 옥 지팡이를 쥐고
아침에 황학루(黃鶴樓)를 떠났다오

오악(五嶽)의 신선을 찾아 먼 길마다 않고
한평생 명산에 들어가 노니길 좋아한다네
여산은 남두성(南斗星) 옆에 빼어나게 솟아 있고
병풍구첩(屛風九疊)은 구름 비단이 펼쳐있는 듯
그림자가 밝은 호수에 잠겨 검푸르게 빛난다
금궐암(金闕巖) 앞에는 두 봉우리가 길게 펼쳐지고
은하수가 세 개의 돌다리에 거꾸로 걸렸다
향로봉 폭포가 저 멀리 보이고
굽이진 절벽, 겹쳐있는 봉우리는 푸른 하늘을 찌른다
푸른 산빛, 붉은 놀, 아침 햇살이 비치니
새도 날아 못 가는 오(吳) 땅의 먼 하늘
높이 오르니 천지간의 장관이니
장강은 도도히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누런 구름 만 리에 퍼져 하늘색을 바꾸고
흰 물결 아홉 줄기 설산(雪山)에서 흐른다

여산의 노래를 즐겨 짓는 것은
흥취는 바로 여산에서 밀려오기 때문

석경(石鏡)을 조용히 들여다보니 내 마음 맑아지는데
사공(謝公)의 노닐던 곳은 푸른 이끼 속에 묻혀 있다
아침에 단약(丹藥)을 먹어 세속의 마음이 사라지고
금심삼첩(琴心三疊)으로 도(道)를 처음 이루니
아득히 채색구름 속 선인이 보이는데
부용꽃 손에 들고 옥경(玉京)에 조회한다.
먼저 구천(九天) 위에서 한만(汗漫) 만날 기약했으니
노오(盧敖)를 만나 태청(太淸)에서 노니길 바라 노라.

여산 오로봉(五老峰). 서로 친절하게 밀담하는 다섯 노인이 나란히 서있는 것 같아 여산의 여러 산봉 중에서 제일 유명하다. 이백의 시에는 “여산의 동남 오로봉은 마치 연꽃이 푸른 하늘위에 있는 것 같구나.”라고 쓰여 있다.

한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도 다소 까다롭고 어려운 시이다. 필자 역시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이 시를 나중에 소개할까도 생각했지만 여산과 이백의 인연이 깊고 지난주에 이어 후속타로 이 시를 소개한 것이다. 처음부터 다 알기는 무척 힘들다. 일부만 이해해도 큰 소득이다. 나머지는 천천히 공부하면 된다.

이 시는 이백이 여산의 경치를 찬미한 노래로, 시어사(侍御史) 노허주(盧虛舟)에게 보낸 작품이다. 여산의 수려한 모습을 선계(仙界)의 환상적 세계로 묘사하고, 여산에서 조망한 경치를 장쾌한 필치로 그렸다. 장계(張戒)의 《세한당시화(歲寒堂詩話)》에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태백의 시일 것이다.[此乃眞太白詩矣]”라고 하였다. 정치적 좌절에 따른 탈속의 정취가 광인(狂人)을 표방하며 공자를 비웃고, 단약과 신선을 추구하는 도가적 색채로 나타나 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명(人名)이나 지명(地名) 그리고 전고(典故)를 잘 알아야 한다. 이 시에서는 노허주(盧虛舟)라는 인물이 나왔는데 그는 당나라 범양인(范陽人)으로 자(字)는 유진(幼眞)이다. 숙종(肅宗)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재직한 바 있어 ‘노시어(盧侍御)’라고 한 것이다. 초광인(楚狂人)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육통(陸通)’을 지칭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초광(楚狂)’이라고 불렀다.

《論語》 〈미자(微子)〉편에, “초나라 광인 접여(接輿)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 곁을 지나갔는데, ‘봉새여, 봉새여. 어찌 그 덕이 쇠하였는가. 지난 과거의 일은 간(諫)할 수 없고, 오는 미래의 일은 오히려 따를 수 있으니, 그만둘지어다. 그만둘지어다. 오늘날 정사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험하도다.’[楚狂接與 歌而過孔子曰 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 殆而]”라고 하여 이백이 초광인 접여에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녹옥장(綠玉杖) 은 ‘선인(仙人)의 지팡이’를 뜻하고 황학루(黃鶴樓)는 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 서쪽에 있는 누대이다. 오악(五岳)은 동서남북과 중앙에 위치한 중국의 명산으로, 동(東)의 태산(泰山), 남(南)의 형산(衡山), 서(西)의 화산(華山), 북(北)의 항산(恒山), 중앙(中央)의 숭산(嵩山)을 지칭한다.

여산 노림호(蘆林湖). 면적은 13만m²이에 달하고 물 저장량은 120만m²에 달하며 호군봉이 둘러 있어 산수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지고 있는데 마치 무지개와 같고 물은 허공에서 흘러 매우 기묘하다.

여산수출남두방(廬山秀出南斗傍)의 ‘남두(南斗)’는 별자리 이름으로, 28수(二十八宿) 중 ‘두숙(斗宿)’을 지칭하는데 옛사람들은 여산이 있는 심양(潯陽)이 남두성 자리의 분야(分野)에 속한다고 여겼다. 병풍구첩운금장(屛風九疊雲錦張)의 ‘병풍구첩(屛風九疊)’은 여산의 ‘병풍첩(屛風疊)’을 지칭하는데 《일통지(一統志지)》에, “병풍첩은 여산에 있는데, 오로봉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아홉 번 겹쳐진 것이 마치 병풍과 같다.[屛風疊 在廬山 自五老峰而下 九疊如屛]”라고 하였다. 참고로 오로봉 앞에는 각기 다른 다섯 작은 봉이 있으며 봉우리에는 돌에 새긴 ‘오로동(五老洞)’, ‘영객송(迎客松)’ 등 경관들이 있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일출을 볼 수 있으며 만약 안개 낀 날을 만나면 안개 속에서 소리가 나는 신운(神韻)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운금(雲錦)’은 ‘구름문양을 수놓은 비단’으로, 병풍 첩의 모습을 비단에 비유한 것이며 명호(明湖)는 ‘파양호(鄱陽湖)’를 지칭하는데 중국 최대의 담수호로서 ‘팽려택(彭蠡澤)’, ‘팽택(彭澤)’ 또는 ‘팽호(彭湖)’라고도 부른다. 강서성(江西省)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강(贛江), 수수(修水), 파강(鄱江), 신강(信江), 무강(撫江) 등의 강이 이 호수를 거쳐 장강(長江)으로 들어간다.

금궐전개이봉장(金闕前開二峰長)의 금궐(金闕)은 여산에 있는 금궐령(金闕巖)으로 ‘석문산(石門山)’이라고도 한다. 혜원법사(慧遠法師)의 〈여산기(廬山記)〉에, “서남쪽에 석문산이 있는데, 그 모습이 한 쌍의 궁궐과 같다.[西南有石門山 其形似雙闕]”라고 하였다. 두 봉우리는 향로봉(香爐峰)과 쌍검봉(雙劍峰)이다. 은하도괘삼석량(銀河倒掛三石梁)의 ‘은하’는 폭포를 비유한 것으로, 병풍첩 부근의 삼첩천(三疊泉)을 지칭한다. ‘오천(吳天)’은 여산이 춘추시대와 삼국시대에 오(吳)나라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산 함파구(含鄱口). 함파구는 함파령(含鄱岭) 중앙부에 위치한다. 해발 1211m, 왼쪽에 오로봉이 있고 오른쪽에 태을봉이 있다. 산세가 험준하고 괴석이 겹겹이 우뚝하다, 오목한 모양이고 방향이 파양호에 마주 향하는 것을 한 입에 집어삼키는 것 같아서 ‘함파구’라고 부른다.

황운만리동풍색(黃雲萬里動風色)의 ‘풍색(風色)’은 ‘천색(天色)’ 또는 ‘천기(天氣)’를 뜻하는데 어두운 구름이 만 리 하늘에 펼쳐지며 하늘의 빛이 변하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백파구도류설산(白波九道流雪山)의 ‘구도(九道)’는 ‘구강(九江)’을 지칭한다. ‘설산(雪山)’은 강물이 흰 포말을 일으키며 용솟음치는 것을 ‘눈 덮인 산이 솟아 있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석경(石鏡)’은 ‘거울 같은 바위’라는 뜻으로, 사공(謝公)은 사영운(謝靈運)을 지칭하는데 그의 시 〈등여산절정망제교(登廬山絶頂望諸嶠)〉라는 시에 〈입팽려호구(入彭蠡湖口)〉에서는, “절벽을 더위잡고 올라가 석경을 비춰 보네.[攀崖照石鏡]”라는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영운이 여산을 유람하며 석경에 오른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환단(還丹)은 ‘단약(丹藥)’을 지칭하는데 《광굉명집(廣宏明集)》에, “단사(丹砂)를 태워 수은(水銀)을 만들고, 수은을 되돌려 단사를 만들기 때문에 환단이라고 한다.[燒丹成水銀 還水銀成丹 故曰還丹]”라고 하였다. 금심삼첩(琴心三疊)은 도가(道家)의 수련법으로, ‘기(氣)를 화(和)하게 하여 축적(蓄積)’하는 것을 뜻한다.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에, “금(琴)은 화(和)이고, 첩(疊)은 적(積)이다. 삼단전(三丹田)을 보존하여 화하게 하여 축적하기를 한결같게 하는 것이다.[琴 和也 疊 積也 存三丹田 使和積如一]”라고 하였다. 삼단전은 도가에서 말하는 세 곳의 단전으로, 두 눈썹 사이의 ‘상단전(上丹田)’, 심장의 ‘중단전(中丹田)’, 배꼽 아래의 ‘하단전(下丹田)’이다. 옥경(玉京)은 ‘천궁(天宮)’을 뜻하는데 도교의 전설에 ‘천제(天帝)가 거처하는 곳’이라 한다.

선기한만구해상(先期汗漫九垓上)은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편에, 노오(盧敖)가 북해(北海)를 유람하다가 용모가 고괴(古怪)한 선비를 만나 같이 북양(北陽)을 유람하자고 청하니 그 선비가 “나는 구해지외(九垓之外)에서 한만(汗漫)과 만나기로 기약했으니 오래 머물 수 없다.”고 말하며 구름 속으로 솟아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해(九垓)’는 ‘구중지천(九重之天)’을 뜻한다. 원접노오유태청(願接盧敖游太淸)의 노오는 전국시대 연(燕)나라 사람으로 진시황제가 신선을 찾도록 보냈으므로, 후대에 신선으로 칭하는데 여기서는 《회남자》의 전고(典故)를 반용(反用)하여 고괴(古怪)한 선비를 이백 자신에 비유하고, 노오(盧敖)를 노허주(盧虛舟)에 비유했다. 태청(太淸)은 가장 높은 하늘을 뜻하는데 도가에서는 하늘을 세 곳으로 나눠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이라 하는데, 이 중에 태청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여산폭포도. 이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라는 시를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겸재 정선(鄭敾,1676-1759) 선생이 그린 ‘여산폭포도’가 있다. 그림설명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에서 폭포가 흐르는 ‘석문산(石門山)’은 여산에서도 서남쪽에 있다. 이백의 ‘망여산폭포’라는 시를 그린 것이다. 암벽의 골격은 예리한 필선을 죽죽 그어 내린 정선 특유의 수직준(垂直準)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구도는 금강산 <구룡폭(九龍瀑)>과 철원의 <삼부연(三釜淵)>을 따르고 있다. ‘겸재’라는 낙관 아래에는 ‘장송(長松)은 울창하여 천 명의 병사가 열을 선 듯하고, 성난 물줄기 급히 쏟아지니 만 마리의 말이 소리를 치는 듯하다.[長松鬱立千兵列 怒瀑急噴萬馬喧]’라고 적혀 있다.”

당시 이백이라는 시인과 여산이라는 산이 조선 문인사회에 얼마나 미쳤는가를 잘 반영해준다. 시선은 ‘이백’이요, 명산은 ‘여산’이라는 것을 조선 시인과 화가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필자가 좀 난해한 이백의 이 시를 소개한 것은 이백이라는 시인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고 여산이 어떤 산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필자 이길구는 한문학 박사다.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산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계룡산과 실크로드에 대한 많은 저술을 출판한 바 있다. 현재는 한시(漢詩)에 관심을 두고 연구 활동과 저작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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