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시성’ 두보를 숭배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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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시성’ 두보를 숭배한 이유는?
  • 이길구
  • 승인 2018.12.1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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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의 중국 한시(漢詩)기행] <9>두보(杜甫)의 ‘춘망(春望)’

두보의 시를 사상 처음으로 번역한 나라는 우리나라 조선(朝鮮)이다. 원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다. 원(元)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원본으로 삼아,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에 주석을 달고 풀이했는데, 초간본(初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이 있다.

초간 《두시언해》는 1443년(세종 25) 4월에 착수, 38년 만인 1481년(성종 12)에 비로소 간행된 첫 역시집(譯詩集)이다. 세종·성종 때에 걸쳐 왕명으로 승려 의침(義砧)을 비롯하여 유윤겸(柳允謙)·유휴복(柳休復) 등이 주해(註解)하였는데, 두시(杜詩)에 통달한 사람은 신분과 상관없이 참여했다고 한다.

조선조에서는 두보의 시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해 2회에 걸쳐 발간했다.

한시(漢詩)의 거목(巨木)으로 같은 시대(唐玄宗代)를 산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를 꼽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왜 시선(詩仙) 칭호까지 붙은 이백을 제쳐두고 두보의 시만 골라 우리말로 번언[飜案] 작업을 했을까?

이는 두 시인의 행적(行績)이나 시의 내용을 조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사상적으로 이백은 도가(道家)요, 두보는 유가(儒家)다. 시를 따져보면 이백은 신선(神仙)처럼 자유분방하지만, 두보는 공자(孔子)처럼 조화로운 질서를 중시했다.

두보는 그의 시 음중팔선도(飮中八仙歌)에서 이백을 ‘천자가 불러도 놀잇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칭하기를 신은 술 마시는 신선이옵니다(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라 읊었다. 임금이 총애하던 양귀비에게 붓과 벼루를 들게 했고, 그녀를 ‘말귀를 알아듣는 꽃(解語花)’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현종은 성총(聖聰)이 흐려져 그 속뜻을 모르고 있었다. 이러니 조선조에서는 해어화(解語花)란 ‘한문과 한시를 좀 안다는 기생’을 일컬었으니 이백은 밉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두보인물화. 나라를 걱정한 위국충절의 시인으로 불린다.

아래에 소개하는 오언율시(五言律詩) <춘망(春望)>을 보더라도 두보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이 시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반군(反軍)에 잡혀서 장안(長安)에 억류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그의 수많은 시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임금을 향한 충절이 느껴진다. 왜 이백보다 두보를 조선에서 높이 숭배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가 망했으나 산과 강은 여전하고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  도성에 봄이 오니 풀과 나무만 우거졌네
감시화천루(感時花濺淚)  시세를 슬퍼하여 꽃에 눈물을 뿌리고
한별조경심(恨別鳥驚心)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마음마저 놀랜다
봉화연삼월(烽火連三月)  (전란의) 봉화는 석 달이나 이어지니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값하는 것을
백두소갱단(白頭搔更短)  흰 머리 긁으니 더욱 짧아짐에
혼욕불승잠(渾欲不勝簪)  이제는 비녀도 꽂지 못하겠네

두보의 대표적인 시 <춘망(春望)>. 두보초당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다.

<춘망(春望)>을 지을 당시 두보의 주변 상황을 알아보자. 두보는 반군에게 함락된 장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난리 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을 슬퍼하며 조국과 가족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찼다.

반군은 이미 장안 근처까지 몰려와 있었고 현종은 장안(長安)을 버리고 촉(蜀)으로 도망쳤다. 현종의 피난 행렬이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어가(御駕)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양국충(楊國忠, 양귀비 친척) 일행과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간언하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한다.

양귀비가 죽은 후 현종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촉으로 가고 반군(叛軍)에 대항하기 위해 도성에 남아있던 현종의 태자 이형(李亨)은 영무(寧武)에서 즉위한다. 이 소식을 들은 두보는 자신이 할 역할이 있다고 인지하고 숙종(肅宗, 李亨)이 있는 영무로 달려간다.

그러나 도중에 반군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押送)되지만, 포로 신세는 면한 채 억류됐다. 여기에서 그는 반군에 의해 유린되는 참상(慘狀)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담은 시들을 연달아 창작했다.

두보좌상. 대해(大廨)라는 건물 안에 있는데 ‘대해’는 ‘큰 관청’이라는 뜻이다. 손등이 노랗게 된 것은 두보의 손을 만지면 공부를 잘한다는 속설이 있어 관광객들이 만지고 간 흔적이다.

<춘망(春望)>의 시 내용을 분석해보자.

국(國)은 ‘국가’라는 설과 ‘국도(國都, 장안)’라는 설이 있다. 두 가지 다 맞는 뜻으로 보인다. 시(時)는 ‘시세(時勢)’를 말하며, 화천루(花濺淚)는 ‘꽃에 눈물을 뿌림’이며, 봉화(烽火)는 단순히 봉화가 아닌 ‘전란(戰亂)’을 뜻한다.

‘연삼월(連三月)’에서 ‘삼(三)’은 ‘석 달 동안’이라는 의미라기보다 ‘세 번의 난리’로 해석한다. 가서(家書)는 ‘가족의 편지’, 저(抵)는 ‘상당함’으로 ‘당(當)’자와 같다. 혼(渾)은 ‘전혀’라는 뜻이다. 잠(簪)은 여자의 비녀가 아니라, 남자가 벼슬했을 때 관(冠) 밖으로부터 비녀를 상투에 꽂는 ‘동곳’이라는 것이다.

이 시의 수련(首聯)은 전란(戰亂) 때문에 폐허가 된 장안의 외경 묘사를 통해 시상을 불러왔으며, 함련(頷聯)은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수법을 사용하여 전쟁으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경련(頸聯)은 앞의 정경 묘사에 이어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마지막 미련(尾聯)에서는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다 빠져 비녀도 꽂지 못할 상황이라며 늙고 쇠약해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저번에 살펴봤던 <강촌(江村)>의 싱그럽고 아름다운 자연과 반대되는 작자의 비극적 상황을 강조하지만, 원망의 감정 대신 나라를 걱정하고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한시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두보를 ‘시성(詩聖)’이라고 부른다.

역사비평가로 유명한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온공속시화(溫公續詩話)>에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는 폐허가 되어 남은 물건이 없는 것을 나타낸 것이요(明無餘物矣),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은 사람이 모두 떠나 인적이 끊긴 것을 드러낸 것이다(明無人跡矣)’라고 설명했다. 안사(安史)의 난에 의해 살육과 약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춘망(春望)>을 학창시절 머리를 쥐 나게 했던 두시언해(杜詩諺解)로 감상해보자. 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두시언해를 공부했던 추억을 되돌아보자.

시험과 관계없이 편한 마음으로 살펴봐도 여전히 어렵다. 학창시절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공부를 했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지금도 이것을 배우는 후학들에게 걱정이 앞선다. 지금도 두시언해는 대한민국 고등학교 고전 과정에서 필수이다. 공무원 시험에서도 꼭 출제된다. 애국심을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아직도 우리 사회가 유교 사회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두보초당 공부사(工部祠). 두보를 모시는 사당이다.

필자는 두보를 기리는 사당인 공부사(工部祠)을 찾았다. 그곳에는 그의 소상(塑像)과 석상(石像)이 여러 개 있다. 그런데 얼굴 모습이 약간씩 다르다. 흡수항헌(恰受航軒)에는 시대별, 나라별 두보에 대한 서적 자료 3만 6000여 점과 도자기 등 유물 2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는 이곳에서 4년 동안 머물면서 <춘야희우(春夜喜雨)> 등 240여 편의 시를 지었다.

초당 곳곳에는 두보의 시를 칭송하는 많은 주련이 걸려 있다. 시사당(詩史堂)에는 역대 두시 판본과 여러 외국의 번역본 120여 종, 그리고 명청(明淸) 및 근대 명인의 서화들이 소장되어 조그만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침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두시언해(杜詩諺解)>를 비롯한 두보시집도 보인다.

두보서옥(書屋). 두보·이백을 비롯한 한시관련 서적을 모두 비치해 놓았다.

두보서옥에는 한시에 대한 많은 서적이 즐비해 있다. 시에 관한 것은 물론 중국철학 서적도 다 있다. 논어, 맹자 등 중국어로 된 서적을 구입하고 싶었는데 다 보인다. 여간 기쁘지 않다. 상당한 분량의 책을 구입하여 어떻게 한국으로 부칠까 고민하고 있는데 서점 아가씨가 국제우편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너무 즐거웠다. 만약 여기서 책을 부치지 못하면 우체국까지 가야 한다. 지난날 서안(西安)에서 책 꾸러미를 집으로 보내려고 했다가 3시간이나 고생한 적이 있다.

온종일 두보초당을 구경하고 나왔다. 무엇보다도 한시에 관한 많은 서적을 구입했다는 것이 뿌듯하다. 이젠 배가 고프니 맛있는 밥만 먹는 일만 남았다. 두보초당을 걸으면서 그의 험난한 삶과 시작(試作)에 대한 열정을 보았다. 인간은 세상에 나와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것, 그것이 큰 의미이건만 왜 우리는 삶에서 즐거움만을 찾는 것인지.
 
두보는 우리에게 그런 삶은 살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그의 시가 실린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를 손에 꼭 쥐었다. 앞으로 그의 삶을 만나기 위해서다. 초당 후문을 나오면서 잠시 뒤돌아보니 1200여 년 전 두보가 초당을 짓고 지은 시가 생각났다. 제목은 <초당즉사(草堂卽事)>다.

황촌건자월(荒村建子月) : 황폐한 마을 새로 지은 집에 달 떠 있고
독수로부가(獨樹老夫家) : 나무 한 그루 우뚝한 곳은 늙은이의 집이라
설리강선도(雪裏江船渡) : 눈 내리는 속을 나룻배 건너가고
풍전경죽사(風前逕竹斜) : 바람 앞 오솔길에 대나무 비껴있다
한어의밀조(寒魚依密藻) : 차가운 물고기는 마름 풀에 가까이 숨어있고
숙로기원사(宿鷺起圓沙) : 잠자던 백로는 둥근 모래톱에서 날아오르네
촉주금수득(蜀酒禁愁得) : 촉나라 술이 이 시름을 막을 수 있지만
무전하처사(無錢何處賖) : 돈이 없으니 어디서 외상으로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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