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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세기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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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세기의 인연
  • 최광
  • 승인 2018.11.2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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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조병 문학주간 특집] 최광 소설가가 부치는 편지

대한민국 연극계 영원한 거장으로 남은 故 윤조병 선생의 1주기가 돌아왔다. 남다른 고향 사랑으로 생전 자신의 창작 에너지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밝혔던 윤조병 극작가. 고향 후배 문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문학주간을 마련했다. 그를 기리는 행사와 고향을 담은 작품세계, 윤조병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시리즈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① 발자취, 고향 담은 작품세계

② 故 윤조병 극작가의 마지막 제자 '세종민예총 회장’

③ 반세기 인연, 스승 윤조병과 조치원 문학청년

④ ‘내 인생의 지표’ 사람 되자던 윤조병 선생

⑤ 골목길을 더듬어 가니 그곳엔 거목 한 그루가

⑥ 반 세기의 인연 <끝>.

지난 2016년 4월 지역 문인들과 떠난 오천항 문학기행. (왼쪽부터) 김일호 백수문학회장, 윤조병 극작가, 최광 소설가.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새봄 신학기와 더불어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 군대를 갓 제대하셨다고 교감 선생님이 소개했다. 윤조병 선생님의 풋풋한 청년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가르치실 과목은 국어와 수학이라고 했다. 윤조병 선생님과 맨 처음 만남이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상급학교에 가려면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요즘 말로 하면 대안학교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정규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서울의 선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라고 했다. 그래서 학교 이름도 숭신崇信이라고 했다. 선교와 교육을 목적으로 수요일마다 성경수업이 있는 기독교계통의 학교였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야 하는 것도 교칙의 하나였다.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이라 농번기에는 학교에 오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학교에서도 농번기에 봄방학이라는 게 있던 시절이었다. 요즘의 봄방학과는 달리 보리타작과 모내기철에 농사일을 거들라는 방학인 셈이다. 우리 학생들은 집안 농사일이나 작은 학비라도 벌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 중에는 신문을 돌리면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 있었다. 그것도 조간과 석간을 돌리며 늘 헐레벌떡 뛰어다니던 학생이었다.

조간인지 석간인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학생은 윤조병 선생님이 신문에 났다며 신문기사를 펼쳐보였다. 순식간에 학생들이 모여들어 신문기사로 머리를 디밀었다.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는 있는 중앙의 유수한 일간지였다. 정말 윤조병 선생님의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문학작품이 당선되었다고 난리가 나버렸다. 기사의 내용이 무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상금도 꽤 큰 그런 상이라고 했다. 문학이 무언지 아리송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교과서 이외에 동화책이나 문학책을 접하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가끔 만화책 같은 걸 접하기는 했지만 나는 만화의 황당한 상상이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국어시간이 되었다. 모두 문학에 대한 궁금증이 가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잔잔한 긴장의 순간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학생 누군가가 다짜고짜로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문학이 뭐 예요?”

선생님은 잠시 교단을 서성이시다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외갓집에 간다고 하자. 그때 빨갛게 저녁놀이 물들었다고 하자. 그 아름답고 설레는 마음을 글로 써보는 거야.”

우리는 선생님의 그 말씀에 아무도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주 쉬워 보이지만 어떻게 쓰이는지 여전히 아리송했다.

선생님의 그 말씀은 평생 내 가슴에 남아있다. 문학청년이 되어서도 그 말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더 많은 문학수업을 하면서 그 의미는 작은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언젠가, 시는 무용이고 산문은 도보여행이라는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의 말이 떠올랐다. 무용은 반짝반짝하는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고, 도보여행은 스쳐가는 인연과 풍경들을 차근차근 그려가는 기록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물론 상상의 여행에서 쓰는 허구지만 말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선생님은 타고난 산문작가이시고 리얼리스트임이 분명하다.

선생님은 수학도 가르치셨다. 당시 학교 교사들은 선교회에서 오신 분들과 지역 교육운동을 하시는 분들로 구성되었다. 대게 두 과목 정도의 수업을 맡으셨는데 어문학 쪽의 영어와 역사를 맡거나, 이과 쪽의 수학이나 과학을 맡는 게 통례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신기하게도 극작가이면서 국어에다 수학 과목도 맡으셨다. 나는 어문학 쪽의 영어나 역사 같은 과목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에는 거리를 느끼고 있었다. 왠지 꼬치꼬치 따지는 과목은 골치 아프다는 선입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수학이라는 과목이 그렇게 어렵고 골치 아픈 과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생님의 수학수업에서 느꼈다. 작은 단서에서 단계적으로 어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쉽게 가르치셨다. 그게 방정식 수업이었는데 어렵지 않고 명쾌하게 다가왔다. 주어진 팩트에서 하나씩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논리의 기본이고 해법이라는 사실을 막연하게 깨달았다. 그 로드맵은 내 인생의 오랜 지침이 되었다.

우리는 졸업을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상급학교에 가기도 하고 직장을 찾아 대도시로 떠난 애들도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누구는 공무원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사업가가 되기도 해서 다시 만났다. 조치원 신흥리에 계시는 윤조병 선생님을 찾아뵙자는 동기로. 지금의 기억으로는 신흥리 어디쯤인가 사랑채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계셨다. 숭신학교 때와는 달리 살림살이가 깔끔했다. 농협이라는 그럴싸한 직장도 다니고 계셨다. 그 뒤로 선생님과의 연은 닿지 않았다. 나도 무엇을 해야 할지 무수한 고민에 쌓여서 도시와 고향을 넘나들며 방황하던 때였다. 그래도 가끔 책을 사보고 무언가를 써보려는 의지는 버리지 않았다.

책방 개업으로 인연이 이어지다

어느덧, 나는 이십대 후반이 되었다. 당시 조치원에는 한두 개의 책방이 있었는데 가끔 기웃거려 보아도 읽을거리가 빈약하고 학습참고서류가 전부였다. 나는 시간이 날 때 시내버스를 타고 이웃도시 청주로 갔다. 거기에는 욕심이 나는 읽을거리가 가득했다. 나는 단골 책방에 가서 뜬금없이 눈에 띄는 대로 책을 사보았다. 문학책이 중심에 있었지만 다 읽지도 못한 거창한 철학책도 여럿 사들였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조치원에서도 학습참고서류 말고 교양서적을 파는 책방을 하면 안 될까 하는 사업구상이 생겼다. 최소한의 생활비만 벌면서 주경야독으로 글을 써볼 생각이었다. 다행이 조치원역 앞 네거리에 신축건물이 생겨서 임대문의를 해본 결과 그리 크지 않은 자본으로도 개업이 가능했다.

그 책방 개업으로 선생님과의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선생님은 조치원에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문학의 푸른 꿈을 찾아 상경하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가끔 고향에 들리실 때마다 책방에 오시곤 했다. 책방은 비교적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매출이 올라서 구색이 늘어났다. 십여 평의 책방은 책으로 넘쳐나서 확장을 고민하던 차에, 바로 옆에 두 배 이상 매장을 늘릴 수 있는 가게가 나왔다. 조치원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양복점 자리였다. 맞춤복이 퇴조하고 기성복으로 시장 흐름이 넘어가던 때였다. 몇 배로 비싼 임대료지만 그간의 경험이 자신감을 부추겼다.

자전거 좀 빌려다오.

책방이 그런대로 번창하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내려 오셔서 자전거를 빌려달라고 하셨다. 책방을 한다고 하지만 자가용이나 오토바이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전거가 운반수단의 전부였던 때였다. 소골(전동면 송곡리 일대)에 한번 갔다 오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저 바람이나 쐬실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문학은 그때까지 그렇게 낭만으로 비쳐졌던 것이리라.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낙향을 하시기 위해서 집을 보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럴싸한 직장을 버리고 상경하실 때에는 고차방정식의 묘수를 보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선생님의 능력이라면 작가로서의 입신과 출세가 보장되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참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선생님은 생계가 막연해서 겸업을 하시면서 작가의 길을 모색하셨던 모양이다. 심지어 자살을 하려고 인천 어딘가 포구에 들렸다가 어머니 젖꼭지 같은 섬을 보고 애초의 의도를 버리고 ‘젖섬 시그리블’이라는 작품을 구상하고 돌아오셨다는 후일담을 문학회 모임 뒤풀이에서 듣게 되었다. 선생님의 작품연보에 87년 10월 극단 성좌에서 공연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그게 허튼 말씀이 아니었다. 그 뒤에 연속해서 희곡상을 받으시면서 상금으로 생활비를 버셨다니까 고차방정식 묘수풀이가 아닐 수 없다.

80년대, 선생님의 작품이 대학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아마 전국연극제라는 무대였을 것이다. 이십대에 호기심으로 삼일로 창고극장을 한두 번 기웃거려 본 적은 있으나 본격 연극은 접해보지 못했다. 선생님의 공연은 조치원의 자부심으로 작용해서, 당시 백수문학 회원들과 함께 대학로 극장에 가보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금 기라성 같은 배우 손숙, 유인촌 등이 선생님 작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신기한 일도 목격했다.

문학으로 다져진 인연

아무래도 선생님과의 문학적 인연은 내가 2005년에 책방을 닫고 본격적인 문학 글쓰기에 접어들어서이다. 대부분의 명망가들은 중앙무대에만 집착하지 허접한 지방무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모든 무대는 중앙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 문학 현실은 열악하기 그지없어서 명망가들이 지방에서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빛이 나기는커녕 명예에 흠이 나기 십상이거나, 현실적인 아무런 득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선생님은 문학회 월례모임에 꼬박꼬박 나오셨다. 조치원에 거주하는 문인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참석하셨다.

그즈음 연기군이 세종시로 전환되던 때였다. 지명을 문학회의 제호를 썼기 때문에 연기문학에서 세종문학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고, 크게 무리 없이 세종문학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제호를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향상에 집중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문학회 회원들의 작품을 적당히 모아서 동인지를 출판하는 차원에 머물지 말고 작품토론회를 통해서 검증된 작품으로 출판을 하자는 데 합의하고 활발한 교류와 협동이 이루어졌다. 운문, 산문의 경계를 넘어서 학습하고 토론해서 저마다의 경지에 이르자는 목소리였다. 실제로 이 시기동안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활발한 토론과 작품 생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 자신도 소설과 시를 넘나드는 작품생산에 몰두했다. 그 성과야 각자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제삼의 문학운동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 윤조병 선생님이 있었다. 대가로서 차원 높은 지적과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선생님은 늘 문학청년 못지않은 열정으로 세종문학 카페에 오른 작품을 읽고 연구해서 격려와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하고 뒤풀이에서 술 마시기도 거기에 버금갔다.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한 한 때였다. 실제로 세종문학에서 운문과 산문을 두루 섭렵하려는 시도는 과학이나 문화예술에서 융복합개념과 궤를 같이 한다. 이때의 학습과 열정은 오롯이 선생님의 공으로 돌려도 무방하다.

최광 소설가.

수년 전에 강릉에서 열린 전국지방연극제 심사위원장으로서 동인들을 초대해주셔서 이박삼일동안 연극을 만끽했다. 동해안 바닷가 백야펜션 침실에서 바라보던 일출은 언제나 해맑은 추억이다.

선생님은 오늘도 묵묵하고 꾸준한 작가의 길을 가고 계신다. 이런 덕목은 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귀감이기도 하다. 나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청출어람에 이르지 못함을 개탄하고,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돌아보고, 그 대안에 몰두해야 함을 직시한다.

참으로 오랜 인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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