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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더듬어 가니 그곳엔 거목 한 그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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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더듬어 가니 그곳엔 거목 한 그루가
  • 강소금
  • 승인 2018.11.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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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조병 문학주간 특집] 강소금 작가가 부치는 편지

대한민국 연극계 영원한 거장으로 남은 故 윤조병 선생의 1주기가 돌아왔다. 남다른 고향 사랑으로 생전 자신의 창작 에너지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밝혔던 윤조병 극작가. 고향 후배 문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문학주간을 마련했다. 그를 기리는 행사와 고향을 담은 작품세계, 윤조병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시리즈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① 발자취, 고향 담은 작품세계

② 故 윤조병 극작가의 마지막 제자 '세종민예총 회장’

③ 반세기 인연, 스승 윤조병과 조치원 문학청년

④ ‘내 인생의 지표’ 사람 되자던 윤조병 선생

⑤ 골목길을 더듬어 가니 그곳엔 거목 한 그루가

연기군 시절 윤조병 선생과 동인회 회원이 함께 찍은 사진. 윗줄 왼쪽에서 6번째가 윤 선생이다.

혜화동 예술가의 집 앞엔 커다란 감나무 한그루가 있다. 다닥다닥 붙지도 않고 그렇다고 엉성하지도 않게 매달려 있는 감은 잘 생긴 장두감이다. 잘 익은 감과 노란 색,붉은 색을 띠기 시작한 감잎. 그리고 알맞은 밝기의 조명이 정겹다.

그 뒤편에서 우리들을 어서 오시게, 라고 맞이해 주는 분은 희곡작가인 윤조병 선생님이다. 아니 선생님의 옆얼굴을 크게 확대해 놓은 걸개그림이다. 비스듬한 자세의 선생님은 적당한 밝기와 어둠에 싸여 여유 있는 표정으로 웃고 계셨다.

예술가의 집 구조 또한 독특했다. 현관에 들어서니 2층 같았는데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소박하고 단정한 건물이 맘에 들었다. 인문학 강의 두 번째 시간인 희곡작가와 <하.땅.세> 극단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윤시중 선생의 묻고 대답하기가 열리는 곳이다. 윤시중 선생은 선생님의 둘째 아드님이다. 사진으로 본 그는 아버지와 판박이다. 안경을 썼고 입가엔 장난기가 묻어있다. 하지만 눈매가 날카롭다. 복제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7시 30분 시작이지만 20분 전에 입실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임동천 시인과 김정현 선생과 함께 말 잘 듣는 유치원생이 되어 시간 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드디어 인문학 강의가 시작된다. 아주 작은 탁자엔 생수 병이 올라와 있고 무선 마이크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1분의 오차도 없이 윤시중 선생이 나타났다. 그리고 선생님이 자리를 잡으셨다. 누가 봐도 부자지간임을 알 수 있게 이목구비가 닮았다. 그러나 여러분 안녕하세요? 윤시중 선생이 말문을 여는 순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음색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들어왔던 낯익은 소리다.

때는 1970년 중반이며 무대는 새터 1구다. 등장인물은 여인 넷이다. 시댁으로부터 큰 살림을 물려받아 집주인 노릇을 했던 오씨 아줌마와 우리 엄마와 나. 그리고 가끔 집주인을 벗 삼아 놀러오던 또 한 여인. 우리엄마는 집주인과 함께 늘 뜨개질을 했다.수공에 비해 수입은 쥐꼬리만 했던, 일본으로 수출하는 여성용 스웨터를 짜는 일이었다. 손재주가 많았던 우리엄마와 오씨 아줌마다. 사실 오씨 아줌마는 남편이 괜찮은 직장에 있었고 사는 것이 넉넉했지만 늘 머리가 복잡하고 불면증에 시달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생계형의 부업이 아닌 셈이었다. 그림이 떠오른다.

뿔테 안경을 썼고 칠칠한 검은 머리를 길게 묶고 다녔던 ...그리고 목소리가 기름졌던... 또 다른 그림 한 장. 그분의 손엔 늘 작은 문고판 책이 들려 있었는데 그 책은 낡고 보푸라기가 일어나 있던 걸로 기억한다.

‘저 애기 엄마 남편분이 작가시란다. 시나리오가 당선 돼서 영화도 찍었다 하던데. 그리고 죽림동에 있는 숭신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친다지 아마?’ 아하. 난 곧바로 그분을 현진건의 작품 <빈처> 로 연결시켰다. 우리가 세 들었던 주인집의 오씨 아줌마는 그 시절에 많이 배운 사람이었고 먹고 사는데 걱정 없는 사람이었다. 흠이 있었다면 남편의 관심과 사랑이 도가 지나쳐 바깥출입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동네 아줌마들과도 절대 어울리지 못했으며 그 집 안방을 드나든 사람은 유일하게 우리엄마와 나, 그리고 책 읽는 아줌마였다.

우리는 오씨 아줌마가 내놓는 홍차 맛에 길들여졌고 작가의 아내는 뜨개질 더미 속에 발을 묻고 앉아 책을 읽었다. 엄마와 오씨 아줌마는 암말 않고 앉아 언제까지고 뜨개질을 했다. 오래된 벽화 속의 여인들처럼. 또 한 장의 그림이 떠오른다.

때는 1960 년대고 무대는 새터 2구다. 살림이 궁색해져서 방아미에 있던 집을 줄이고 줄여 새터로 이사 온 우리 외가. 훗날 나의 시댁이 된 또 한 집. 윤 선생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또 한집. 이건 내 기억이라기 보단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우리엄마를 통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풍경들이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가끔은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거 같은 착각을 갖게 했다.

내 나이 대여섯 살쯤이다. 외갓집 앞 좁은 골목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여느 애들처럼 활발하게 놀 줄을 몰랐다. 항상 엄마 치마꼬리를 붙들고 다니다가 그게 안 될 때는 멍한 채 하늘이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어떤 생각 속으로 끌려 들어가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네가 아무개구나! 나는 생각의 방에서 뛰어나왔다. 허리선을 강조한 고급스러운 분홍빛 공단 원피스다. 음색이 맑고 곱다. 윤이 나는 검은 생머리를 손수건으로 느슨하게 묶은 젊은 아줌마는 날씬하고 예뻤다.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온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됐다. 어마! 얘가 너무 부끄럼을 타네. 할머니 안녕하시지? 이모는? 그리고 막둥이 삼촌도? 연거푸 안부를 했지만 난 한마디도 못하고 도망쳐 대문 안으로 숨어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선생님의 누이동생이고 그 댁엔 아주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듣게 된다.

윤씨 집 안 사람들이 머리가 뛰어났다는 얘기. 선생님 어머님의 붓글씨 솜씨가 너무 아까웠다는 얘기. 고만고만한 형제자매들이 우리 외가의 외삼촌들과 이모와 나이가 비슷비슷해서 가끔은 말썽을 피워 양가의 어머니들을 곤란하게 했다는 얘기. 하지만 우리 외할머니나 선생님의 모친 두 분은 점잖아서 한 번도 큰소리가 난 일이 없었다는 얘기. 배고픔. 아이들의 식탐. 복숭아를 리어카로 사 들여서 나누어 먹었다는 얘기며 사춘기의 소년 소녀들 중에선 누가 누구를 은근히 짝사랑 했다는 얘기.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늘 아쉬움으로 끝났다. 연속극의 중간을 뚝 끊어버린 것만 같은 안타까움이랄까.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그 얘기의 끝을 기대했지만 얘기 듣는 거 너무 밝히면 가난뱅이로 산다는, 외할머님의 엄한 나무람을 끝으로 엄마의 얘기주머니는 바닥을 보였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80년대가 저물어 가던 어느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지역의 문학 동인들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누군가는 떠나버렸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시기였다. 선생님은 이미 수도권에서 자리를 잡고 – 내가 그렇게 느낀 거다. 그분의 작품세계며 사생활은 전혀 알지 못하던 때였다. - 계시던 선생님은 일 년에 서너 번? 얼굴을 뵐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동인회의 혼란 속에서도 소설을 써보겠다면서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어느 해던가. 동인지가 나왔고 합평회가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호된 나무람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무안했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아마 그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돌아왔던 거 같다.

회식자리에 빠진 걸 걱정하는 선배들의 전화가 두 번 쯤 왔지만 난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선생님과 선배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난 땅속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고 그분들을 맞아들였다. 세월이 갔지만 선생님과 우리 엄마의 만남은 오랜 시간 전의 이웃사촌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선생님이 더 어려워졌고 집안 망신까지 시킨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아예 선생님과 멀찌감치 자리를 잡아 앉곤 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리 집을 다녀가시면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깜짝 놀랐어요.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었다고 허풍을 떨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이렇게 나와 우리 집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2002년 여름이다. 그해 봄에 오하 김재붕 선생님이 소천 하셨다. 난 오랫동안 부친을 잃은 것 이상의 슬픔으로 맥이 빠져있었다. 그해 동인지는 오하 선생님의 특집이었으며 나와 장시종 시인이 오하 선생님을 회고하는 글을 썼다. 마침 윤조병 선생님이 나의 단편소설을 지도해 주셨고 합평회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소설지도를 받기 위해 두 번 선생님을 뵈러 상경했다. 그땐 한국종합예술대학, 보통 한예종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강의를 하고 계실 때였다.

현직 배우들이나 예술가들이 높은 경쟁을 뚫고 들어가려고 애쓰는 그곳에서 희곡 창작 강의를 맡고 계신 선생님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선생님이 무척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내 보인다는 게 두렵고 떨렸다.

한예종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식판에 밥을 푸고 그날의 별식으로 나온 포크커틀릿(돈까스) 위에 소스를 듬뿍 치면서 청년처럼 씩씩하게 걸어오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청바지에 줄무늬 티셔츠 차림이 잘 어울리셨다. 애써 꾸미지 않은 수수한 차림새가 오히려 세련된 배우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긴장감으로 내가 음식을 씹는 소리가 느껴졌고 이마엔 땀이 송송 맺혔다. 맛있게 들어요. 여기 음식 괜찮아. 낯가림이 심한 내게 선생님은 그렇게 먼저 손을 내미셨다. 그러면서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지셨다.

왜 이렇게 마음을 열지 못해요? 작가란 사물이든 사람이든 자기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눈을 크게 뜨고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해요. 작가는 사실을 써야 하지만 그 속에는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는 기술,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고 또 냉철하지만 따숩게 다가서야 하고.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새터의 그 방에서 만났던 세 분의 여인들이 차례로 소풍을 떠나셨다. 오씨 아줌마가 제일 먼저 떠나셨다. 그리고 사모님이 가신지 두 해 만에 우리 엄마가 떠나셨다. 뒤 돌아보면 나는 늘 허둥댔고 늘 무언가를 핑계로 글쓰기를 피했다. 경제적 궁핍을, 때론 나의 건강을, 엄마의 병간호를, 그러다보니 글은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고 난 커다란 바위처럼 나를 막아서는 글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나의 오랜 꿈이자 나의 근원인 글쓰기는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다녔다. 나는 동인지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글을 쓰지 않으면서 문학동인지에 남아 있는 게 무척이나 민망했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문학의 담장 밖에서 서성이며 나는 이따금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사모님이 여러 차례의 수술과 투병으로 힘들다는 소식이었다. 선생님은 모든 일을 접고 사모님의 간병에 매달려 계시다고. 그러나 나는 선뜻 찾아 뵐 수가 없었다. 마음으로만 애달팠다. 저 연기문학 총무 아무개입니다, 라고 전화를 드리면, 선생님 바꿔 드릴게요, 하면서 상냥하게 대해 주셨던 그 목소리. 책읽기에 열중해서 저녁 밥 때를 놓치고 이걸 어째? 하면서 서둘러 일어서던 그 모습이 천천히 내 눈앞을 스쳐갔다. 나이를 먹어도 늘 소녀처럼 보였던 사모님의 쾌유를 마음속으로만 빌었다.

전업 작가의 아내로 최선을 다해 선생님을 뒷바라지 했던 사모님이 이승의 집을 떠나셨다. 간병으로 지친 선생님의 얼굴이 빛바랜 창호지 같았다. 긴장이 풀린 선생님은 무릎이 아파서 문상객들을 제대로 맞이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허탈하게 허허허...헛웃음을 웃고 계셨다. 정말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 두 번이나 상가에 갔지만 아무 말씀도 못 드렸다.

오래지 않아서 나 역시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긴긴 병수발을 했지만 막상 임종을 맞게 되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게 숨이 턱 턱 막혔다. 핑계 삼아 밤마다 가수 장사익이 부르는 찔레꽃, 이란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통곡했다. 그렇게 석 달쯤 울고 나니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따금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선생님은 나를 부르실 때 강 동지! 라고 하셨다. 나는 동지, 란 단어가 마치 포화 속을 헤치고 나온 전우, 라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곤 했다. 그다지 싫지 않은 호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천안으로 둥지를 옮기셨다. 천안시 안서동. 호수가 있고 아담한 대학들이 정겹게 모여 있는 태조산자락 아래로 이사를 오신 거다.

어느 날, 우연히, 여기 왔는데 참 좋더라구요. 그냥, 사는데 까지 한 번 있어보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더니, 이거. 하면서 내놓으시는 얄팍한 책 한권. <윤조병 희곡집- 신작 2인극 희곡집> 이다.

제목도 특이하다. 자음만을 따서 <ㅋㄷㅋㄷ>. 키득키득 이다. 선생님은 작가의 앞소리에 이렇게 쓰셨다. 어리석고, 멍청하고, 주춤거리고, 느려터진... 하아! 이것이 바로 선생님이다. 어리석어 보인다. 때론 멍청해 보인다. 때론 주춤거린다. 그리고 느려 터지게... 수차례 반복된 사모님의 대수술. 수술실의 아내를 기다리며 가슴 졸이던 시간들. 간병. 통곡대신 헛웃음 한 번 웃고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작품 속의 할버지와 할머니들, 아니 자신과 사모님의 얘기를 이어나간다. 어리석지 않았으면? 멍청하지 않았으면? 주춤거리지 않았으면? 느려터지지 않았으면?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퍼뜩, 또 한 개의 그림이 떠오른다.

‘참, 그땐 모두가 가난했느니라. 어찌나 머리가 좋았던지 동급생의 과외선생으로 학비를 벌어 학교를 마쳤다고 하더라. 특히 수학을 그렇게 잘했다네.’ 우리엄마의 이야기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선생님에 대한 신화다. 미적분을 풀고 어려운 물리학 과제를 매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까까머리의 고등학생을 그려보면 안쓰러움과 대견함, 영민함, 이런 단어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 인고의 시간이 문학과 만나 희곡분야의 큰 나무로 성장했음이 틀림없다.

부자간의 이야기는 약간의 긴장감이 흐른다. 윤시중선생의 재치 있는 입담이 청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인문학 강의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아오를 무렵이다. 선생님의 작품을 확실하게 청중들에게 전달 해 준 대본 독해. 천의 목소리를 가진 배우 남미정의 독해는 청중들의 눈과 귀를 <ㅋㄷㅋㄷ>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몰입이다. 70여명의 관객과 두 사람의 배우가 하나로 모아진다. 대본 독해가 이런 것이었구나! 무대장치와 조명이 없이도 이렇게 몰입할 수 있고 함께 느낄 수 있음이 신기하기만 했다.

언젠가 조심스럽게 여쭤 본 일이 있다. 선생님의 작품세계의 근원은 어디일까요? 아, 그건 바로 어머니지요. 그리고 여인이지요. 초등학교 때 만났던 여선생님들. 결혼을 해서는 아내지요. 그리고 나의 작품의 배경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즉, 유년의 기억이지요. 전쟁과 배고픔과 여인과 사랑과 ... 혼란 속에서의 질서와 진실을 찾고 우린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을 이기지요. 때론 슬픔도 정말 엄청난 에너지로 다가오지요.

<ㅎ ㅇ ㄱ ㅎ ㄱ – 휘파람소리 > 에서 선생님은 사랑의 극치, 순화, 생명의 존엄...을 내게 전해 주셨다. 작품을 읽고 느끼는 건 각자의 몫이므로 나는 감히 그렇게 느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하얀 의자>는 세상의 병원들과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수많은 의료진들의 상징이다. 현대의학의 한계와 간병을 하는 가족들의 애환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런 시간을 체험했기에 더 절절 하게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문학을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을 수 있다. 그러면 이걸 뭐라고 부를 것인가. 이건 명약이다. 그리고 글을 쓴 작가는 명의다. 글을 통해 생명을 살린다면 최첨단으로 가고 있는 의료기기나 거액을 투자하는 신약개발보다 더 위대한 일이다.

천안에서의 짧은 휴가를 마친 선생님은 다시 서울 근교로 터전을 옮기셨다.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천안의 작은 방에서, 학교 앞 카페에서 어지간히 기운을 찾으신 거 같다. 물론 외로움의 근원을 차단 할 순 없다. 선생님은 소년처럼 웃으시면서 말씀하신다. 나는 <차세대 작가> 로 남고 싶어요. 아하! 텅 빈 공간을 차고 올라온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노작가의 꿈 이야기가 정말 신선하다. 물리적인 나이를 뛰어 넘어선 선생님은 청바지를 입고 주홍색 머플러를 두르고 카페에서 작업을 하신다. 천안 역 부근의 롯데리아를 젊은이들에게 기죽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나드신다.

어느 날이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말 큰 용기를 냈다. 선생님, 저도 희곡 좀 배울 수 있을까요? 일주일의 어느 하루도 허룩한 날이 없는 선생님의 계획표 한 귀퉁이를 염치도 좋게 비집고 들어섰다. 선생님의 수많은 제자 중에 맨 꼴찌로 자리를 얻었다.

지난해 겨울이다.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와 그가 50여 년 동안 쓴 작품을 꼼꼼하게 읽고 나서 대담에 나섰던 요미우리 신문사의 문예부 기자인 <오자키 마리꼬> 의 < 오에 겐자부로 , 작가 자신을 말하다 >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신문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15년 동안을 한 작가에게 몰입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강소금(필명) 작가.

선생님의 고향인 세종시 조치원읍에서도 그런 열정을 가진 독자가 나오기를 고대한다. 아니 희곡에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의 공연예술에 열정을 바칠 인재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선생님께 긴한 말씀을 올린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계셔서 후학들을 돌아 봐 주십시오, 라고. 늦깎이로 나선 나 역시 늘보의 걸음으로 가되, 열정을 잃지 않는 성실한 제자 되어 선생님을 따라갈 것을 약속드린다. (2016년 11월에)

* 덧붙임 : 좀 더 멋진 북 콘서트를 계획했던 스승님은 2017년 10월에 이승을 떠나셨다. 그 대신 마지막 제자인 나는 < 계유년의 봄 > 이란 희곡 한편을 완성했다. 천안에서부터 수원, 기흥까지 스승님 가르침을 따라 움직였던 3년간이 내겐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2018년 11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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