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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인연, 스승 윤조병과 조치원 문학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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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인연, 스승 윤조병과 조치원 문학청년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8.11.2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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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조병 문학주간 특집] ③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최광 편

대한민국 연극계 영원한 거장으로 남은 故 윤조병 선생의 1주기가 돌아왔다. 남다른 고향 사랑으로 생전 자신의 창작 에너지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밝혔던 윤조병 극작가. 고향 후배 문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문학주간을 마련했다. 그를 기리는 행사와 고향을 담은 작품세계, 윤조병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시리즈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① 발자취, 고향 담은 작품세계

② 故 윤조병 극작가의 마지막 제자 '세종민예총 회장’

③ 반세기 인연, 스승 윤조병과 조치원 문학청년

최광 소설가. 윤조병 선생과는 중학교 3학년 어릴 적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만났다. 윤조병 선생은 고향에 올 때마다 최 작가의 책방과 자택을 찾아 담소를 나눴다.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故) 윤조병 선생과 사제지간으로 만나 반세기의 인연을 이어온 사람이 있다. 소설가 최광(65) 작가다.

윤조병 극작가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안학교쯤 되는, 서울 선교재단에서 운영하던 조치원 숭신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당시 이 학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정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다니던 곳이었다. 윤 선생은 군입대 전후로 숭신학교에서 국어와 수학 과목을 가르쳤다.

최광 작가는 중학교 3학년 시절 이곳에서 평생의 큰 스승, 윤조병 선생을 만나게 된다.

“중학교 3학년 때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직한 윤조병 선생님이 담임이 됐다. 가난한 집 학생들이라 학비를 벌며 일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신문 배달을 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어느날 친구가 가져온 신문에 선생님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작품 당선 기사였다. 중앙 유수 일간지에 선생님이 실리다니. 막연하게 문학을 하신다는 이야기만 알려졌던 터라 학교에 큰 화제거리가 됐다.”

최 작가가 문학가를 꿈꾸기 전, 언젠가 윤조병 선생이 국어 시간에 했던 이야기가 있다. 훗날 문학가가 된 제자는 이 문장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문학이 무엇이냐는 친구의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외갓집에 간다고 하자. 그때 빨갛게 저녁놀이 물들었다고 하자. 그 아름답고 설레는 마음을 글로 써보는거야”라고. 그 말씀이 문학청년이 되고,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있다.”

당시 숭신학교 교사들은 수학과 과학 또는 문학과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달라 윤 선생은 당시 국어와 수학을 함께 가르쳤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워낙 공부를 잘하셨다. 대동초 다닐 때 월반을 할 만큼 뛰어나셨다. 월반을 해서 보통 학생들보다 일찍 청주중학교에 입학했다. 실제 선생님 아버님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유학생 출신이다. 연기군 총무과장까지 지내셨다.

이후 선생님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지역 대안학교에 오시게 됐다고 들었다. 수학을 가르치실 때는 작은 단서에서 단계적으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쉽게 알려주셨다. 하나의 실마리로 답을 향해가는 논리적 해법은 인생의 오랜 지침이 됐다.”

숭신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 뿔뿔이 흩어졌다. 윤조병 선생이 신흥리 어디쯤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 그는 동기 대 여섯명과 윤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이후 최 작가는 도시와 고향을 오가며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양지서원 책방이 이어준 인연

세종시 조치원역 인근 건물에 위치한 조치원 작은도서관에 윤조병 선생의 수상 희곡집이 전시돼있다.

최광 작가는 1979년 조치원 역 앞 사거리에 양지서원이라는 책방을 개업했다. 이 책방이 윤 선생과 그를 다시 이어준 계기가 됐다.

“선생님은 고향에 내려오실 때마다 책방에 들르셨다. 어느날엔 자전거를 빌려달라고 하셨다. 나중에 들었는데, 낙향을 하기 위해 집을 보러 오신 거였다. 생계가 막막해 겸업을 하실 생각이셨던 것 같다.

자살을 하려 인천 어딘가 포구에 들린 적도 있다고 하셨다. 나쁜 마음을 먹고 간 포구에서 어머니 젖꼭지 같은 섬을 보고 ‘젖섬 시그리블’이라는 작품을 구상하고 돌아오셨다는 후일담을 문학회 뒤풀이에서 듣게 됐다. 다행히 1981년 대한민국연극제 대상을 시작으로 중앙 무대 거장이 되셨다. 선생님은 줄곧 상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는 2005년 책방 문을 닫았다. 본격적인 문학 글쓰기에 접어들면서 윤 선생과의 교류도 잦아졌다. 

“중앙에서 명망 있는 유명인이 되면 지방 문단에 자주 내려오기 어렵다. 하지만 선생님은 문학회 모임에 매달 꼬박꼬박 참석해 후배들을 지도하셨다. 연기군이 세종시로 전환되던 시기다. 연기문학도 세종문학으로 제호를 바꾸면서 작품생산에 몰두했다. 그 중심에 늘 선생님이 계셨다. 문학청년 같은 열정으로 후배들의 작품을 잃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최광 소설가가 생전 윤조병 선생과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회상에 젖어있다. 

문학회 뒤풀이 2차 장소는 늘 최 작가의 집이었다. 그 시기 최 작가의 집은 지역 문학살롱으로 불렸다. 고향에 올 때면 윤 선생은 늘 최 작가의 집에 몸을 눕혔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늘 문학회 뒤풀이에서 나왔다. 선생님은 약주도 좋아하셨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즐거웠다. 희곡을 쓰시는 만큼 화법도 재밌으셨다. 늘 주무시고 일요일에 올라가셨다. 집사람도 선생님을 성심껏 모셨다. 작품 교류를 떠나 부모님같이 생각했다.”

윤 선생은 생전 중병을 앓았다. 지역 문인 후배들은 그가 암에 걸린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투병 소식을 최대한 숨기고자 했던 윤 선생의 의지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조용히 가고 싶다며 후배들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다. 2016년 세종시문화재단 행사에 오셨을 때도 진통제를 맞아야 할 정도였다. 작고하시기 3일 전 아내와 호스피스 병원을 찾아가 마지막으로 뵀다. 그때도 선생님은 “오래 있지 말고 얼른 가라”하셨다. 인생과 예술에 있어 언제나 가장 귀감이 되는 분이다.”

다행히 조치원에는 아직 윤 선생의 생가가 남아있다. 어린 시절 형제들이 함께 지낸 곳이다. 유족들 역시 윤 선생의 고향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조치원 문화재생, 문화콘텐츠 측면에서 윤조병 선생님의 기념사업이 중요하다고 본다. 지역 문학 단체가 연합해 유족과 함께 선생님 기념사업회를 꾸리면 어떨까. 지금도 수많은 상패와 기념물이 남아있다. 이 물품을 보관할 공간은 고향인 세종시에 만들어져야 한다.

특히 아드님이 극단 하땅세 대표로 선생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장기적으로도 지역 문화자산으로의 가치가 충분하리라 본다. 앞으로 지역사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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