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내 인생의 지표' 사람 되자던 윤조병 극작가
상태바
'내 인생의 지표' 사람 되자던 윤조병 극작가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8.11.27 1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조병 문학주간 특집]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김일호 편

대한민국 연극계 영원한 거장으로 남은 故 윤조병 선생의 1주기가 돌아왔다. 남다른 고향 사랑으로 생전 자신의 창작 에너지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밝혔던 윤조병 극작가. 고향 후배 문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문학주간을 마련했다. 그를 기리는 행사와 고향을 담은 작품세계, 윤조병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시리즈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① 발자취, 고향 담은 작품세계

② 故 윤조병 극작가의 마지막 제자 '세종민예총 회장’

③ 반세기 인연, 스승 윤조병과 조치원 문학청년

④ ‘내 인생의 지표’ 사람 되자던 윤조병 선생

김일호 백수문학회장. 윤조병 선생과 백수문학 동인회에서 만나 긴 인연을 이어왔다.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예순이 넘은 후배는 故 윤조병 선생의 말을 뼛속 깊이 새겨 인생의 지표로 삼았다. 김일호(66) 백수문학회장 이야기다.

생전 세종시 동인회 활동을 해 온 윤조병 선생은 작품 평론에 있어서는 냉혹하리만치 혹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혹여 서운해할 후배들을 위해 뒤에서 어깨를 다독였다는 후일담은 동시에 그의 인간적 면모도 드러낸다. 김 회장은 오랜 시간 동인회 활동을 하면서 윤 선생을 봐왔다.

“아마 몇몇 젊은 후배들은 서운하기도 했을 것이다. 백수문학 초기 회원들은 과거 백용운 회장으로부터 이골이 나 훌훌 털어버렸다. 혹독한 조언을 해주셨지만 늘 다시 다독여주시기도 했다. 겉으론 강인하셨지만 속은 여린 인간적인 모습도 보였다.”

백수문학은 1955년 창간돼 이듬해 첫 창간호를 발행했다. 윤조병 선생은 1960년대부터 동인회에서 활동했다. 김 회장은 이번 윤조병 선생 문학주간을 맞아 윤조병 문학길 걷기 행사 가이드 역할을 했다.

“어릴적 절친이 윤조병 선생의 친동생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 단체 영화관람을 가면 영화화된 선생님의 작품을 관람하곤 했다. 선생님은 백수문학이 연기문학으로 갈라지고 나서도 후배 문인들을 아우르며 문학으로만 이야기하신 분이다. 최근 옛 기억을 더듬어 선생님 문학길 걷기 행사를 안내했다. 내게도 참 특별한 분이다.”

"우리 사람하자" 문학의 역할

지난해 4월 오천항 문학기행 당시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일호 백수문학회장, 윤조병 선생, 최광 소설가.

김 회장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문학회 뒤풀이에서 술잔을 부딪혀 가며 밤새워 얘기하는 날은 드물었다. 다만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늘 윤 선생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새겼다.

“말없이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선생님은 “김 회장은 왜이리 말이 없나”묻기도 하셨다. 언젠가 한 번 모임에서 선생님께 “저는 나이가 육십이 넘었는데 눈물이 많다”고 푸념하니 “철들지 마라, 철들면 죽는 거다”라고 하셨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늘 철들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김 회장 스스로 인생의 지표로 삼은 말은 “우리 사람하자”는 문장이다. 인생의 길에서, 문학의 길에서 늘 이정표가 된 말. 그는 현재 바르게살기운동 세종시협의회장도 맡고 있다.

“선생님은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늘 사람하자고 하셨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자는 말씀이다. 주변을 보면 사람 노릇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성과 도덕, 윤리가 붕괴된 사건들을 많이 접한다. 살아가면서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늘 이 말을 떠올린다.”

만년 청춘으로 살던 윤조병 선생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공허함을 드러냈다. 윤 선생의 아내는 현재의 세종의원인 과거 조치원의원 간호사로 일했다. 윤 선생은 당시 지역 문학인들이 모였던 문학살롱 김제영 소설가의 집 앞을 오가며 아내를 만났다. 실제 김재영 원로 작가는 윤 선생이 처이모이기도 하다.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빈자리가 보였다. 작품활동은 오히려 열정적으로 하셨다. 사모님에 대한 시와 작품도 내셨다. 작품을 보면 사랑과 그리움이 엿보인다. 여전히 잊지 못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겉으로는 강인하셨지만 뒤에서는 아마 눈물을 많이 흘리셨을 거다.”

문학의 뿌리, 후배 문인들에게 남겨진 역할

김일호 백수문학 회장이 윤조병 선생 사후 후배 문인들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윤 선생은 생전 고향에 대한 애착심도 컸다. 연기군에서 세종시로 바뀔때에는 지역 후배 문인들의 역할을 특히 강조했다. 문학의 뿌리를 지키라는 의미에서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고향에 대한 애정이 크셨던 것 같다. 후배들이 고향을 잘 지키고, 백수문학도 문학의 뿌리로서 튼튼하게 자라야 한다고 하셨다. 후배들이 그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말년에는 고향 연기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고향에 올 때마다 윤 선생은 노트북과 카메라를 챙겼다. 수시로 스케치하기 위해서다. 늘 조치원역에 내려 고향의 공기를 만끽했다. 후배들에게 병환을 숨긴 채, 시한부 인생임을 알고도 먼 걸음을 마다않고 백수문학 행사를 찾기도 했다.

“거동이 힘들어질 시기에는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듯이 “내 몸이 말을 안 들어 고향에 못 내려간다” 하셨다. 요양병원에 머물게 된 선생님은 현재 세종시의원이 된 박용희 전 백수문학회장에게 마지막 시집과 희곡집 발간 소식을 문자로 전했다.”

백수문학은 올해로 84집을 발간했다. 깊은 역사를 가진 동인회장으로서 그는 윤조병 선생이 생전 후배 문인들을 아우르며 화합했던 것처럼 지역 문인들이 힘을 모아 그를 기억해야 한다는 역할론을 강조했다. 

“중앙 무대에서 거장으로 조명받은 선생님이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후학들이 기념사업을 이어나가야야 한다. 필요하면 선생님이 생전 살았던 조치원에 문학관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종시가 출범했지만 여전히 문학의 뿌리는 연기군에 남아있다. 선생님을 계기로 지역 문학계가 기존 문학인, 새로 이주한 문학인을 함께 어우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