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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윤조병 극작가의 마지막 제자 '세종민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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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윤조병 극작가의 마지막 제자 '세종민예총 회장'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8.11.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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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조병 문학주간 특집] ②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강영숙 편

대한민국 연극계 영원한 거장으로 남은 故 윤조병 선생의 1주기가 돌아왔다. 남다른 고향 사랑으로 생전 자신의 창작 에너지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밝혔던 윤조병 선생. 고향 후배 문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문학주간을 마련했다. 그를 기리는 행사와 고향을 담은 작품세계, 윤조병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시리즈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① 발자취, 고향 담은 작품세계

② 故 윤조병 극작가의 마지막 제자 '세종민예총 회장'

고 윤조병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진 세종민예총 강영숙 지회장. 필명은 강소금이다. 윤 선생은 타계 직전 약 3년 여 간 강 작가의 첫 희곡 작품 <계유년의 봄>을 지도했다.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생전 고(故) 윤조병 극작가는 대장암을 앓았다. 병마가 깊어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제자들의 작품 지도를 놓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세종민예총 강영숙(60) 지회장이 그의 마지막 제자다.

고향 지역 문단에서 극작가를 배출하고 싶었던 윤조병 선생의 꿈은 타계 직전에야 이뤄졌다. 생이 다하기 직전까지 줄곧 소설을 써 온 강 작가의 첫 희곡 작품을 약 3년 간 지도한 것.

집필을 망설이는 강 작가에게 “강 동지, 자네가 해보게”하고 결연한 제안을 해준 것도 바로 윤조병 선생이었다.

윤 선생이 거처하는 지역을 오가며 완성한 작품이 바로 <계유년의 봄>이다. 670년부터 673년까지 비암사와 금이성 등을 배경으로 불비상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은 강 작가의 남편 김정현 씨가 맡았다.

완성된 작품은 세종민예총 낮도깨비 문예 계간지에 나눠 실렸다. 강 작가는 이후 고 윤조병 선생의 영전에 첫 희곡을 올렸다.

“희곡 분야에서는 아마 마지막 제자가 아닐까 싶다. 돌아가시기 20일쯤 전, 정확히는 2017년 9월 18일까지도 작품 지도를 해주셨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주사 7~8개 매달고 수업을 하셨다. 주치의 교수님이 “선생님이 행복해하시면 열심히 하세요”했던 그 날이 기억 속 마지막 모습이다. 10월 12일 다시 뵈러 가기로 했었는데, 그날 아침 10시에 부고 소식이 왔다. 병문안 가려던 길을 돌려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강 작가가 윤조병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완성한 희곡 <계유년의 봄> 원고 자료와 작품이 실린 낮도깨비 계간지. 파일철 앞에 윤조병 선생의 소천일이 적혀있다.

강 작가가 기억하는 고 윤조병 선생은 영원한 차세대 작가다. 작품에 대해서는 한 치의 빈틈없이 철저했지만 마음은 따뜻한, 자유로운 예술가 그 자체였다는 것. 윤 선생은 실제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젊은 감각을 뽐냈다.

“작품 지도를 받으면서 평균 한 달에 한두 번씩 뵀다. 2015년 천안에 거주하실 때는 호서대 앞 NY라는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늘 커피를 주문하셨다. 경기도 기흥으로 이사하시고는 수원역 롯데리아에서 만났다. 선생님은 햄버거도 참 좋아하셨다.

20년 연배 차이가 났지만 푸른 청바지에 모자, 점퍼도 형형색색으로 입으시곤 했다. 늘 차세대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 마음속에 이미 선생님은 여전히 차세대 작가이시다.”

제대로 된 밥 한 번 못 사드린 것이 후배 문인들의 빚으로 남았다. 윤조병 선생은 늘 후배들을 만날 때면 밥과 술값을 기어이 내곤 했다. 글로 벌어먹는 후배들의 넉넉지 않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 윤 선생도 전업작가로 치열하고 청빈하게 살았다.

경기도 기흥의 한 순두부집에는 아예 밥값을 적립해 놓기도 했다. 늘 계산대에서 옥신각신해야 하는 후배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강 작가에 따르면, 항상 약속 장소에 10분 먼저 도착해 후배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조치원 신흥리 동네

강 작가가 생전 윤조병 선생을 떠올리며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 윤조병 선생과 그의 마지막 제자 강영숙 작가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 선생이 살았던 조치원읍 신흥리는 강 작가의 외가 동네다.

강 작가는 아주 어릴 적 윤 선생의 모친을 “할머니, 할머니” 부르며 따랐다. 윤조병 선생의 아내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다.

“우리 어머니와 주인집 오씨 아주머니는 방에서 손뜨개 부업을 했다. 주인집 아주머니와 선생님의 사모님이 인연이 있었다. 그 집에 종종 문고판을 들고 오셔서 책을 보시곤 했다. 긴 생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셨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 사모님 되시는 분이었다. 윤기 있는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로 가까워진 것은 2002년 무렵. 강 작가는 당시 연기문학 8집에 오하 김재붕 선생의 추모글을 실었다.

오하 김재붕 선생은 고대 백제 역사를 연구한 지역 사학자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부터 조치원공립여고 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1983년 제1대 연기군 향토사연구소장을 지냈다.

“그저 단순한 고향 후배에서 달리 보시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김재붕 선생님의 추모글을 보고 남다른 관심을 주셨다. 쓰던 소설이 진도가 안 나갈 때인데, 이후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그를 보았다>라는 단편 소설을 완성했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근무하고 계셨던 선생님을 찾아뵀다. 김재붕 선생님 추모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사후에 같은 동인 중 누가 나를 이렇게 기억하겠나”라고. 이후 선생님은 2014년 세종민예총에서 발간한 <백제에서 세종으로> 김재붕 선생님 편에 글을 실어주셨다. 글을 요청했을 당시 선생님은 오히려 “고향 후배들에게 빚진 것이 많다”고 하셨다.”

지역 문인 후배들은 거장으로 인정받았던 중앙무대와 달리 지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윤조병 선생의 발자취를 기록해왔다. 타계 후 문학주간을 시도한 것도 같은 이유다.

“돌아가시기 1년 전 세종에서 선생님 북콘서트를 열었다. 중앙무대와 달리 지방에서는 선생님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이날 시집 1권, 희곡집 1권, 어린이 아동극 한 편을 발표하셨다. 생이 다 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신거다. 올해 민예총 차원에서 문학주간을 운영한다. 미미하지만 시작이 되리라 본다.”

강 작가는 낮도깨비 계간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특히 내년 봄호에는 비암사에서 출토된 국보 106호 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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