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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연기군 흔적', 위태롭게 품은 연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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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연기군 흔적', 위태롭게 품은 연기면
  • 정은진 기자
  • 승인 2020.12.19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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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세종 한바퀴 연기면 2편] 연기면 곳곳에 살아 쉼쉬는 '옛 연기군'
미래 세대를 위한 보존의 가치는 퇴색... 신도시 건설에 급급한 현주소 드러내
연기면 폐가 안에 붙어있는 도로명주소 변경 공문. 2010년 11월 10일 연기군수라는 글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사진=정은진 기자)

[세종포스트 정은진 기자] 2012년 7월 1일 출범한 세종시. 8년 남짓한 짧은 역사의 세종시는 기나긴 옛 연기군의 역사 위에 세워졌다.

연기군 역사는 3만년 전,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문가들은 금강 연안을 중심으로 발견된 바위그늘과 청원군 노현리 두루봉 동굴, 그리고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 등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연기군 주변 지역에 약 3만년 전 인류가 생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토록 긴 시간을 품은 연기군이 세종시에게 명맥을 이어준 현재. 연기군 지명은 사라졌으나 그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살아 쉼쉬고 있다. 후대인 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해 잘 보존해야할 소중한 자산들이다. 

세종 한바퀴를 통해 돌아본 현실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했다.   

연기면 폐가 안에 뒹굴고 있는 각종 생활 집기들. 이는 누군가가 이곳에 살았던 흔적이다. (사진=정은진 기자)

√ 연기군 흔적은 찾았으나... 방치된 현주소 노출 

세종시에 살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세종시 이전의 역사, 연기군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보존된 연기군의 터라던가 누군가는 했을법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작업, 사라진 많은 것들을 모아둔 아카이브 자료는 없을까. 늘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필자는 서울에 살때 인천이 대규모 개발 현장을 르포 사진작업으로 기록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인천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이 합심해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하자'는 마음에서 비롯된 프로젝트였다.

이처럼 다른 지역에선 신도시 개발 이전의 역사를 간직한 터를 기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편이었으나, 세종시 출범 이전 '연기군'의 모습이 새겨진 기록물은 찾기 힘들다. 

연기면 월산 1리 버스 정류장 (사진=정은진 기자)

왜 였을까. 추측컨대 연기군 안에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이 세종시로 명명되자 이를 보도하는 언론도, 기록하고자 하는 인력 조차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복청이 연기군의 고유한 지명을 신도시에 반영하거나 국립민속박물관이 연기군 마을의 일부를 아카이브 해놓긴 했지만, 세종시 신도시에 대규모로 지어지는 박물관 단지 안에 세종시 이전의 땅을 기억할 수 있는 '연기군 역사박물관'도 기획되지 않았던 것은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새로움'과 '개발'에 눈이 멀어 과거의 것을 제대로 보존하거나 기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닐까.  

보존하려 했지만 방치되고 있는 전통가옥 (사진=정은진 기자)

당시 이곳에서 연기군의 원주민들을 내보내고 세종시를 세우는 과정을 지켜봤던 전 공무원 A씨는 쓴소리를 했다. 

"여기서 살던 많은 사람들은 씨족으로 이루어진 사람들로 같은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와 LH는) 꿋꿋한 역사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던 그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 급하게 보상을 거친 후 신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많은 상처를 입고 이 지역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유실됐으며 지키려는 의지조차 적었다."

신도시 건설에 급급하다보니, 원주민과 해당 지역 유산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비롯한 지역성 보존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연기면 안에 있는 연못과 전통 가옥 (사진=정은진 기자)
방치되고 있는 전통가옥 앞에는 LH가 설치해놓은 안내문이 있다. '보호예정'이란 말이 무색하게 전통가옥 내부는 황폐하게 방치되어 있다.  (사진=정은진 기자)

이에 본지는 다 같이 돌자 세종 한바퀴 '읍면편'의 올해 마지막인 '연기면'을 통해 과거 '연기군'의 흔적을 찾고 되새기고자 했다. 

살았던 사람들이 급하게 떠난 모습이 역력한 폐가와 LH의 팻말 아래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전통가옥들. 또 집터의 흔적과 폐쇄된 버스 정류장, 방향을 잃은 이정표들. '세종시'라 명명된 새로운 주소를 고지했던 연기군수의 마지막 공문까지. 

세종시 신도심 안의 연기면 곳곳에 남아있는 연기군 흔적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그대로 방치된 채 연기군 흔적을 쓸쓸하고 초라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연기면 월산 1리 버스정류장  (사진=정은진 기자)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수는 없다. 세종시는 신도시의 영광을 안고 앞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의 기억을 대변하는 증거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이들은 이 땅 위에 삶을 일궜고, 또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 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지금도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 

우리는 이처럼 누군가가 마지못해 내놓은 땅 위에 살고 있다. 그 위에 세워진 '세종시'란 이름이 높은 건물만 있는 허황된 땅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잊어서는 안될 이름, '세종시' 라는 새로운 이름 아래 잠들어있는 역사의 이름. 바로 '연기군'을 잘 보존하고 물려줘야할 이유는 분명하다. 

연기군에 쓰였던 전봇대에 위성방송 안내가 적혀있다. 반대편에는 연기군 지역번호였던 041 번호가 명명되어 있었다. (사진=정은진 기자)
원주민 터전이었을까. 누군가 급하게 떠난 듯 보이는 폐가 (사진=정은진 기자)
폐가 안의 내부  (사진=정은진 기자)
폐가 내부는 생활 집기들이 그대로 황폐하게 방치되어 있다. (사진=정은진 기자)
보호예정이라는 오래된 팻말이 붙어있는 연기면의 또 다른 전통가옥  (사진=정은진 기자)
전통가옥은 현재 보수 중이다.  (사진=정은진 기자)
5생활권과 인접한 미호천 근처에서 찾은 연기군의 옛 터. 국방부에서 만든 감시용 시설인지 용도는 확실하지 않다. (사진=정은진 기자)
폐가와 삶이 공존하는 곳. 이 너머로 멀리 세종 신도심이 보인다.  (사진=정은진 기자)
전월산 아래 남아있는 집 터와 전봇대  (사진=정은진 기자)
전월산 아래, 연기군의 옛 집터에서 바라본 세종신도심  (사진=정은진 기자)

[옛 연기군(현 세종시) 역사 되돌아보기]  

 

*신석기*청동기시대*삼한시대

금강유역에서는 연기군과 인접해 있는 공주군 석장리와 부여의 라복리에서 신석기 유적 발견. 연기지역에서는 주로 남방식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연기군은 청동기 문명이 활발히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 연기지역은 마한에 속해 있었으며 어느 소국에 속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천안과 공주지역, 그리고 아산지역이 제소국(諸小國)으로 비정되는 지역이 있어 연기지역도 이들 지역 안에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백제의 영토에 속해 전의지역은 대목악군의 구지현이고 연기지역은 일모산군의 두잉지현이었으며, 금남지역은 웅진의 강역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엔 전의지역은 대록군의 속현으로 금지현이라 했고, 연기현은 연산군에 속해 이때부터 연기라 이름하게 됐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 서기 757년)

 

*고려시대 *조선시대

처음 '도'라는 행정구역이 등장했다. 오늘의 충청지역은 성종때는 공주, 홍주, 천안 쪽은 '하남도' , 목천, 전의, 연기 쪽은 '충원도'라 했으며, 현종 때는 '양광도'라 했다. 전의지역의 금지현을 전의현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년)에 연기현과 함께 청주목의 속현에 속했으며, 명종 2년(1172년)에 감무(監務)를 따로 두었으나 뒤에 다시 목천감무(木川監務)로 겸임케 했다. 

태조 4년(1395년)에 전의에 감무를 뒀으며, 태종 6년(1406년)에는 연기에도 따로 감무를 뒀다. 태종 13년(1413년)에는 현감으로 했다. 다음 해인 태종 14년(1414년)에는 전의현과 연기현을 합해 전기현으로 했다가 태종 16년(1416년)에 각각 환원했다.

숙종 6년(1680년) 읍인만설의 모역벌주(謀逆伐誅)로 인해 문의(文義)에 속했으나 1685년 복구하여 연기현이라 이르게 됐다. 고종 32년(1895년)에 전국 지방관제를 개정함에 따라 각각 군이라 칭하고 군수를 두게 됐다. 이때 전의군은 군내면 외 6개면과 연기군은 서면 외 6개면을 관할하게 됐다.

 

*일제시대 *근현대

1911년 연기군의 군청 소재지를 지금의 연기리에서 현재 군청 소재지인 조치원으로 이전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전의군과 연기군을 합하게 된다. 1920년 4월 면제 개정에 따라 조치원읍을 신설하고, 1읍 6면 101동리를 관할하게 됐다. 

1986년 10월 3일에 지방자치법 제10조의 규정 및 연기군 읍면출장소 설치 조례 제955호('86.10.30공포)에 의거, 전의면 소정리, 대곡리, 운당리에 전의면 소정출장소를 신설했다. 1995년 94년 12월 2일 내무부장관의 승인으로 소정출장소 관할 운당1,2리, 소정1,2.3리, 대곡1,2,3,4리, 고등1,2리의 11개리를 편입해 95년 1월 1일자로 소정면으로 승격했다. 

 

*현대

노무현 정부에서 연기군에 행정수도 이전을 계획했으며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연기군'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연기'라는 지명 자체는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구 남면)으로 남아 있다.

 

출처 : http://www.yeongi.go.kr/ (연기군 홈페이지. 이 홈페이지는 현재 없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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