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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총알받이 조선청년 그리고 만리타향 위안부[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8-2>연산공립보통학교와 전시동원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 | 건축학 박사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세종포스트는 전 원장이 근대도시에서 발굴한 우리 삶과 문화, 식민지 질곡의 역사적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일제에 의해 행해진 강제징용, 강제노동, 강제이주, 일본군위안부, 군용기헌납 등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중국 훈춘에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고 타계한 박서운 할머니. 당시 위안소에서 200m 거리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살다가 2011년 12월 눈을 감았다. 2006년 4월 전재홍의 사진
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점심식사를 앞두고 일왕에게 기도를 하고 있다.

총알받이 훈련, 연산보통학교 학생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제국은 나이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게 했으며 일왕에 대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가마니 짜기나 퇴비증산, 모내기, 벼 수확 등 갖가지 노동에도 동원을 했다.

1945년에는 생필품과 모든 물자를 통제하고 심지어 놋그릇 수저와 같은 식기와 화로, 쇠솥 등 자잘한 쇠붙이까지 전쟁용품으로 징발해갔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면서 벼랑 끝에 몰리자 연산보통학교 학생들 손에까지 목총을 쥐어줘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다. 군복과 군모, 각반까지 착용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어린 남녀학생들이 목검과 목검이 없는 학생은 작대기를 들고 교사의 시범을 따라하고 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며 초등학생들도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였다. 남학생이 책보자기를 옆에 끼고 열을 지어 등교하고 있다.
등교한 학생들은 제일 먼저 운동장 건너 언덕에 지어진 신사(神社)를 찾아 일왕에 대한 참배를 해야 했다.
1939년 봄 모내기에 동원된 학생들이 열을 지어 모를 심고 있다. 뒤에 호남선 철로와 전봇대, 초가집들이 보인다.
연산보통학교 학생들이 실습시간에 가마니를 짜고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윗도리를 벗은 학생들이 수확해 온 곡식을 탈곡하고 있다.
음악 수업시간에 일제 야마하사의 풍금 앞에서 교사와 여학생들이 사진을 찍었다.

강제징용과 강제노동

일제는 러일전쟁 무렵부터 한반도에 군사시설 구축을 시작했다. 연이은 개전을 하며 전국을 본격적으로 요새화했다.

태평양전쟁이 패전으로 기울어지면서 당시 우리민족은 갖가지 동원과 수탈에 처하게 된다. 1942년부터 선발된 징용병들은 일본과 국내외에 산재한 광산, 땅굴, 군사시설,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1945년 광복직전, 논산 구자곡면과 양촌면에서 일본에 끌려 간 징용병들의 나라공원 기념촬영. 논산문화원제공.
강필봉씨는 17세 때인 1937년부터 제주도 알뜨르비행장으로 알려진 일본 해군항공대비행장 격납고 거푸집 목수로 참여했다. 2005년 전재홍의 사진.
제주도 알뜨르비행장 공사에 참여한 이백년씨. 우마차 100여대로 조직된 대정마차조합에 가입했다. 제주에서 쌀이나 시멘트를 싣고 한라산이나 비행장까지 날랐다. 2005년 전재홍의 사진.
제주도 노동자의 피와 땀이 어린 알뜨르비행장 격납고의 내부. 입구 노출을 최소화하려 꼬리날개가 통과하는 곳만 높게 틔었다. 일본해군은 이곳을 중간기착지로 해 중국 상해나 본토를 공격했다. 2009년 전재홍의 사진.
제주도 가마오름 일본군사령부 진지동굴 공사에 동원된 이성찬씨. 이옹은 “당시 일본군은 각 마을에서 일주일에 소 한 마리씩 공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2005년 전재홍의 사진.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에 미국과 최후의 일전에 대비해 충북 영동에 대규모 땅굴을 팠다, 충북 영동군 예전리 김팔복씨도 마을 주민과 함께 동원되었다. 현재는 포도주 저장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2009년 전재홍의 사진.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의 군함도. 1945년까지 약 500~8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노역을 했고 122명이 사망했다. 2014년 전재홍의 사진.
군함도의 폐허가 된 학교건물. 2014년 전재홍의 사진.

일본군위안부
  
1943년에는 의무병역제인 징병제, 1944년에는 학병제를 실시해 청년들과 대학생을 일본군으로 징집해 전선으로 내몰았다.

일왕의 칙령인 ‘여자정신대근로령’을 공포해 수십만의 미혼여성을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했고 일부는 중국과 동남아 전쟁터의 위안부로 보내졌다. 광복이 되면서 일부는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에 오지 못한 위안부도 많았다.

또한 만주지역으로의 강제이주가 한반도 전역에서 행해져 식민지배기의 민초들은 고향을 뒤로한 채 열차에 올라야만 했다.

박서운 일본군위안부는 중국 훈춘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멀리 벗어나지도 못하고 당시 위안소에서 200m 거리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살다가 2011년 12월 타계했다. 2006년 4월 전재홍의 사진
대전 천동에 살았던 위안부 김오순 할머니(가운데 · 2011년 타계)를 찾아간 위안부 김화선 할머니(왼쪽 · 2012년 타계)와 필자가 2008년 10월 촬영.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의 위안부 이옥선(왼쪽), 문필기 할머니가 위안소 재현 공간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 할머니는 2008년 타계했다. 2006년 3월 전재홍의 사진.

강제이주 후 중앙아시아 이주

중국과 접경지역에서는 일제의 압제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주한 고려인들은 마을을 형성해 정착해 갔다. 그도 잠시,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에 의해 강제로 화물열차에 실려 이동 중 추위와 기아로 사망한 사람이 속출했다. 시체는 달리는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고 한다. 
 

3월인데도 칼바람이 매서웠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과 북한을 배경으로 한 전광운씨. 부모가 1923년 함경북도 라진에서 만주로 이주한 뒤 중국에서 태어났다. 2006년 3월.
조선족 중국인이 되어버린 전씨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 이른바 ‘항미원조군’으로 징발되어 도문을 거쳐 북한 남양으로 입북했다. 1950년 6월 원산에서 대기 중 개전되자 구미까지 내려 왔다고 한다. 2006년 전재홍의 사진.
참전 시절의 전광운씨. 전씨는 연합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가 중공군이 개입할 때 다시 참전했다. 후에 연변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1978년 퇴직했다.
경남 함양에서 1938년 만주로 이주한 최봉식씨가 초기에 정착했던 복리둔(福利屯)마을. 당시 만주척식회사는 토지와 땔감이 많아 살기 좋다고 홍보하며 이주를 장려, 생활이 어려운 민초들은 이에 현혹되기도 했다. 2005년 전재홍의 사진.
일제기 부모와 연해주 그라스키노에 이주한 리삼수씨. 스탈린의 이주정책으로 인해 1937년 화물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이송되었다. 운 좋게 1974년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 허름한 아파트에서 실명한 부인과 살았다. 2005년 전재홍의 사진.

군용기 헌납운동

일본은 전선이 확대되자 전쟁에서 부족한 군용기 헌납운동을 일본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군용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반도 전역, 해외에 나가 있던 한인까지 확산시켰다.

‘1937년 일본 아이치(愛知)현 조선인들이 군용기헌납기성동맹회를 결성’, ‘1942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청진부민호(淸津府民號) 4대를 헌납키로 결정’, ‘1942년 1월 충북 보은의 보은주조주식회사 이준(일본명:松原慶太郞)사장이 기금 1만원 납부’, ‘1941년 중국 텐진(天津)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군용기 2대를 헌납’ 등의 신문기사가 이를 실증하고 있다.

애국기 충남호 포스터. 군용기 헌납을 독려하는 포스터로 앞날개에 장착된 폭탄과 일장기가 보인다. (卞成顥 경북대 석사논문 사진 인용)

1938년 7월 9일에는 ‘충남호’와 ‘대동호’ 헌납식이 대전 목척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경성에서 2대의 비행기가 오기로 했으나 악천후로 못 왔다. 대신 날씨가 좋은 울산에서 육군군용기 1대를 출발시켜 대전 상공에서 묘기를 보였다.

이와 같이 전 국민과 친일파, 기업, 종교계, 공무원, 학생들까지 전 분야에서 착취, 모금되어 군용기를 헌납케 했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는 1945년 5월 19일 이후 헌납기 행사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애국제1호 헌납기.(卞成顥 경북대 석사논문 사진 인용)
만주에 배치된 애국10조선호.(卞成顥 경북대 석사논문 사진 인용)
조선불교호.(卞成顥 경북대 석사논문 사진 인용)
보국 제745호인 조선장로호.(卞成顥 경북대 석사논문 사진 인용)

 

전재홍  jhjun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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