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의 칙령인 ‘여자정신대근로령’을 공포해 수십만의 미혼여성을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했고 일부는 중국과 동남아 전쟁터의 위안부로 보내졌다. 광복이 되면서 일부는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에 오지 못한 위안부도 많았다.
또한 만주지역으로의 강제이주가 한반도 전역에서 행해져 식민지배기의 민초들은 고향을 뒤로한 채 열차에 올라야만 했다.
박서운 일본군위안부는 중국 훈춘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멀리 벗어나지도 못하고 당시 위안소에서 200m 거리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살다가 2011년 12월 타계했다. 2006년 4월 전재홍의 사진
대전 천동에 살았던 위안부 김오순 할머니(가운데 · 2011년 타계)를 찾아간 위안부 김화선 할머니(왼쪽 · 2012년 타계)와 필자가 2008년 10월 촬영.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의 위안부 이옥선(왼쪽), 문필기 할머니가 위안소 재현 공간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 할머니는 2008년 타계했다. 2006년 3월 전재홍의 사진.
강제이주 후 중앙아시아 이주
중국과 접경지역에서는 일제의 압제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주한 고려인들은 마을을 형성해 정착해 갔다. 그도 잠시,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에 의해 강제로 화물열차에 실려 이동 중 추위와 기아로 사망한 사람이 속출했다. 시체는 달리는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고 한다.
3월인데도 칼바람이 매서웠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과 북한을 배경으로 한 전광운씨. 부모가 1923년 함경북도 라진에서 만주로 이주한 뒤 중국에서 태어났다. 2006년 3월.
조선족 중국인이 되어버린 전씨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 이른바 ‘항미원조군’으로 징발되어 도문을 거쳐 북한 남양으로 입북했다. 1950년 6월 원산에서 대기 중 개전되자 구미까지 내려 왔다고 한다. 2006년 전재홍의 사진.
참전 시절의 전광운씨. 전씨는 연합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가 중공군이 개입할 때 다시 참전했다. 후에 연변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1978년 퇴직했다.
경남 함양에서 1938년 만주로 이주한 최봉식씨가 초기에 정착했던 복리둔(福利屯)마을. 당시 만주척식회사는 토지와 땔감이 많아 살기 좋다고 홍보하며 이주를 장려, 생활이 어려운 민초들은 이에 현혹되기도 했다. 2005년 전재홍의 사진.
일제기 부모와 연해주 그라스키노에 이주한 리삼수씨. 스탈린의 이주정책으로 인해 1937년 화물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이송되었다. 운 좋게 1974년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 허름한 아파트에서 실명한 부인과 살았다. 2005년 전재홍의 사진.
군용기 헌납운동
일본은 전선이 확대되자 전쟁에서 부족한 군용기 헌납운동을 일본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군용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반도 전역, 해외에 나가 있던 한인까지 확산시켰다.
‘1937년 일본 아이치(愛知)현 조선인들이 군용기헌납기성동맹회를 결성’, ‘1942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청진부민호(淸津府民號) 4대를 헌납키로 결정’, ‘1942년 1월 충북 보은의 보은주조주식회사 이준(일본명:松原慶太郞)사장이 기금 1만원 납부’, ‘1941년 중국 텐진(天津)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군용기 2대를 헌납’ 등의 신문기사가 이를 실증하고 있다.
애국기 충남호 포스터. 군용기 헌납을 독려하는 포스터로 앞날개에 장착된 폭탄과 일장기가 보인다. (卞成顥 경북대 석사논문 사진 인용)
1938년 7월 9일에는 ‘충남호’와 ‘대동호’ 헌납식이 대전 목척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경성에서 2대의 비행기가 오기로 했으나 악천후로 못 왔다. 대신 날씨가 좋은 울산에서 육군군용기 1대를 출발시켜 대전 상공에서 묘기를 보였다.
이와 같이 전 국민과 친일파, 기업, 종교계, 공무원, 학생들까지 전 분야에서 착취, 모금되어 군용기를 헌납케 했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는 1945년 5월 19일 이후 헌납기 행사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