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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 입고 칼 쥔 일본인 교사, 살벌한 식민교육[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8-1>연산공립보통학교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 | 건축공학박사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이번에는 일제의 식민교육 역사 현장을 다녀왔다. 연산공립보통학교에서다. <편집자 주>

연산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

연산보통학교 1회 졸업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송석조 교사, 사사모토교장, 카츠라기 교사, 임종덕 교사. 일제 강점초기 10년 동안은 헌병과 경찰을 통한 무단정치 시기라 일본인 교사는 군복차림에 칼을 잡고 기념촬영에 임했다. 한국인 교사와 졸업생들은 두루마기 차림이다.

일제는 대륙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한다.

그 기저에는 한국인에게 저급한 보통교육만 실시해 일본제국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고, 국어(日本語)를 보급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한국의 언어를 포함, 문화를 말살시켜 한민족을 일제에 동화시키겠다는 계산이었다.

한국역사 과목은 아예 제외시켰다. 실업교육도 추진했는데 일제의 산업에 필요한 하부 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일제의 교육 의도로 1912년 전통도시 연산에 공립보통학교가 4년제로 개교했다. 1916년 3월 첫 졸업식에서 15명이 배출되었고 후에 6년제로 개편됐다.

1회 졸업생 장래목적이 적힌 기록지. 9명은 진학대신 농업과 가사를 원했고 6명은 의학, 농업, 상업, 사범학교에 진학을 원했다. 당시는 의무교육이 아니어‘월사금’이라는 수업료를 냈는데 그나마 차등을 두어 한국인은 일본인의 두 배를 내야했다.
1회 졸업생 도동희의 충청남도 상장. 3학년 때 품행이 좋고 성적이 우수해 수상했다. 그의 재학 중 목표는 사범학교로 적혀있으나 진학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갔고 졸업 후, 공무원의 길을 걷는다.
도동희의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증서. 연산면 관동리 고향의 한 노인은 도동희가 경성고보를 나와 공무원 생활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회 졸업생 도동희(都東熙)는 1904년생으로 학교 앞 연산천 건너 관동리 출신이다.

1920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당진군에서 11급으로 공무원을 시작했다. 연기군, 대전군, 천안군에서 차례로 근무하다 1938년 고향인 논산군에 부임해 근무했다.
 
역시 1회 졸업생인 연산면 고양리의 김유현(金裕鉉)은 1926년부터 다음해까지 연산면장을 지냈다. 재임 시 연산공립보통학교 증축공사에 1만원을 기탁해 그의 지극한 모교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1회 졸업생 송인승(宋寅昇)은 1924년 은진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시작했고, 1952년에 은진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연산공립보통학교 교사들

(사진 왼쪽) 카츠라기는 연산심상소학교에서 12년간 일본인 자녀의 초등교육을 맡았다. 강점기 한국인 학교는 보통학교, 일본인 학교는 소학교로 호칭했다. (사진 중앙) 사사모토(篠本又三郞)는 1912년 연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며 부임한 일본인 교장으로 1918년까지 재직했다. (사진 오른쪽) 노미야마(野見山直喜) 교장은 1936년 부임해 3년간 근무했다.

카츠라기(葛城言造)는 1916년 부임해 학교 내에 설치된 일본인 자녀 전용학교인 연산공립심상소학교 교사로 1927년까지 근무했다.

보통학교내에 설치된 심상소학교 교육은 일본인의 우월감과 자부심을 심어주고 격이 다른 민족이며 1등 국민이라는 정신교육을 바탕으로 했다.

일본제국은 일본 섬을 안쪽 땅, 즉 내지(內地)로 칭하고 한국인을 선인(鮮人) 또는 반도인(半島人)이라 칭했다. 섬나라가 어떻게 안쪽 땅이 될 수 있는지, 당시의 전쟁의 광기에서나 가능한 억지 호칭이 아닐 수 없다.

초등교육부터 철저한 한·일 차등교육을 하면서 내선(내지인과 조선인)일체를 강조하는 이중성은 계속된다. 연산심상소학교는 1940년 연산앵목심상소학교로 개칭됐다.

1939년까지 연산보통학교 교사 명단 중 한국인 이름이 있었으나 1940년부터는 대부분 교사의 창씨개명이 이뤄졌다. 일제의 집요한 창씨개명 등살을 견디지 못했는지 이종근(李種槿) 교사만 한글 이름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듬해 교사 명단에서 한국인 교사 이름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일본 건국일을 맞아 연산보통학교 노미야마(野見山)교장, 나라바야시(楢林)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일장기를 흔들며 연산시가를 행진하고 있다. 오른 편 상단 2층 건물이 시라이(白井)상점이다. 1938.2.11
80년 전 일본 건국일 행진 사진이 촬영된 자리. 시라이상점은 없어지고 왼쪽의 2층 목조건물이 남아있다. 도로는 흙길에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2017년 전재홍의 사진.
일본 건국일을 맞아 학생과 교사들이 연산시가를 벗어나 논두렁길을 행진하고 있다. 야산에 양식건물과 초가집, 창고가 있었다. 1938.2.11.
당시의 논두렁길은 마을길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 신작로가 나기 전까지 연산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2017년 전재홍의 사진.
나라바야시(楢林弘) 교사와 졸업생들이 학교 운동장 끝에 있는 신사(神社) 앞에서 졸업앨범 사진을 찍었다. 여학생은 검정 치마저고리를, 남학생은 두루마기나 교복을 입었다. 나라바야시는 1937년부터 연산심상소학교에서 근무했고 1939년 경성사범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왼쪽)나라바야시(楢林弘) 교사는 1937년 부임해 연산심상소학교에서 2년간 근무했고 1939년부터 경성사범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오른쪽) 남정관(南廷琯) 교사는 1938년 연산황성심상소학교에서 2년간 근무했다. 이름‘정(廷)’자가 비슷한 ‘연(延)’자로 오기되었다.
남정관 교사가 까까머리 학생들과 수업하고 있다. 칠판 위 액자에는 일본어 글이 있고 그 오른쪽에 동남아 지도가 걸려있다.
남정관 교사와 남녀학생들이 개태사 철확에 들어가 기념촬영을 했다. 장소는 연산공원으로 추정되며 함석으로 비 가림을 했다. 1938-1939년 촬영.
강점기 연산보통학교에서 근무를 했었던 남정관 교사는 해방 후 1948년 연산국민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한다.
김근수 교사는 1925년 은진보통학교를 시작으로 1930년 연산보통학교로 전근해 근무했다. 해방 후 연산국민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한다(왼쪽 상단 사진). 김근수 교사는 연산보통학교와 연산국민학교에서 오랜 기간 후학을 양성해 칭송을 받았고 학교 신사가 있던 자리에 제자들이 뜻을 모아 공덕비를 세웠다.
1947년 김근수 교장이 쓴 ‘입신양명’ 휘호. 세월이 흘러 젊은 시절의 사진과는 달리 수염을 길러 교장선생님의 기품이 흐른다.

    

전재홍  jhjun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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