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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쌀 수탈과 논산평야의 눈물[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 <1>충남 논산시 연산면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 | 건축공학박사

쌀 수탈과 한반도

인류의 출현 이래 의식주는 인간생활의 세 가지 기본요소다. 그 가운데 ‘식(食)’은 인간의 생명과 가장 중요하게 연관돼 있다. 예로부터 한반도에서 평야가 광활하게 형성된 충남과 전라도는 지정학적으로 주곡 확보와 밀접한 지역이다.

한반도 최대 평지인 논산‧호남평야는 각각 우리 조상들이 금강·만경강·동진강을 수원으로 고대로부터 농경생활을 해온 곳이다. 충청과 전라도를 기반으로 한 백제는 강한 국력과 풍요로움의 기반인 쌀을 지키기 위해 신라 접경지역에 많은 성을 축조했다. 비류왕 때는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최대 규모의 토목사업인 벽골제를 만들어 천수답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미곡 수확의 기틀을 마련했다.

논산평야와 호남평야의 남북길이는 80㎞가 넘고 전북 완주에서 서해까지 동서의 길이는 47㎞에 달한다. 산이 많은 한국 지형조건으로 볼 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청일전쟁 승리한 日, 쌀 수탈 계획부터 수립

1924년 설치한 갑문으로 선박들은 서해의 밀물과 썰물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강경노조 조합원들이 다카하시(高橋)정미소 앞의 선박에 쌀가마를 싣고 있다. 1930년대 사진.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식량에 대한 중요성과 대륙진출의 교두보인 한반도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토지조사 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했다.

1890년대부터 일본인 지주들이 충남과 전북지역에 정착하며 저가에 농지를 매입하고 미개척지를 개간해 농업경영을 시작했다. 철도와 도로가 미비 된 시점이라 주로 금강, 동진강, 만경강 등 수로로 접근이 가능한 지역과 그 주변에 농장을 개설했다.

1907년 신축된 논산순사주재소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순사들.

보리나 밀과 달리 쌀농사에 필수인 용수 공급을 위해 일본인들의 주도아래 각 지역에서 수리조합이 설립됐다. 논산 탑정저수지, 만경강 상류인 전북 완주 대아저수지·경천저수지 등 많은 수리시설이 일제강점기에 축조되어 쌀 생산의 안정적 기틀이 마련됐다.

1899년 한국정부의 속령에 의해 개항된 군산은 조계지가 설정돼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쌀과 각종 물자 반출을 위한 근대적인 항만시설과 원활한 육로수송을 위해 전군(전주~군산)도로가 1907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포장됐다. 또한 일본인 농장, 정미소, 관공서, 은행, 상가, 주거시설이 급격히 늘어났다.

전주~군산도로(전군도로). 사진 오른편으로 신작로에서 나와 있는 어린이들이, 왼편으로 인력거와 창고가 보인다.

강경에서 금강 하류 40㎞ 거리에 위치한 군산은 해방 때까지 번영을 같이 누렸다. 논산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금강 수로를 통해 군산에서 통관절차를 거친 뒤 일본으로 송출됐다. 강경은 일제강점기에 상권의 최대 정점을 보였으나 육로인 호남선 철도, 국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며 점차 시장기능이 축소됐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서해안 최대 해산물 집산지인 탓에 거래하고 남은 수산물을 염장해 보관했던 축적된 경험을 살려 젓갈산업을 부흥시켜 옛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곡창지대 논산에 급격히 늘어난 정착 일본인

논산지역 첫 이주 일본인 미야케(三宅末次郞).

논산지역 첫 정착 일본인은 오카야마(岡山)현 출신 미야케(三宅末次郞)다. 1899년(明治32년) 8월 강경에 이주한 미야케는 잡화점을 운영했고 다음해 논산에 정착, 미곡중매정미업을 시작했다. 미곡사업으로 부를 얻은 그는 학교조합과 도살장을 운영했다.

1906년 일본인 논산 정착인구가 33명으로 늘자 논산 실력자인 미야케는 일본인의 보호와 치안, 조선인들과의 문제해결을 명목으로 순사주재소 설치를 청원했다. 이에 군산이사청은 강경경찰서논산순사주재소를 개설하고 은진면에서 농사를 짓던 아쿠타가와(芥川正嘉)를 순사로 부임시켰다.

금강 하구에 양식 2층으로 신축된 군산이사청. 일제 통감부가 군산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기관으로 충남 남부까지 관할했다.

아쿠타가와는 1907년 논산 거주 일본인들로부터 부지를 기부 받아 공사비 1300원을 들여 청사를 신축해 강경경찰분서를 설치했다. 논산우편국은 1908년 개설됐고 청사는 1912년 8월 신축됐으며 소장 고지마(兒島岩太郞)와 직원 2명이 업무를 보았다.

한일합방 후 도로가 개통되고 호남선이 기공되자 일본인들의 논산이주가 늘어났다. 1913년 인구는 한국인 2458명, 일본인 623명, 청국인 42명이었다. 이주자 출신지역은 후쿠오카현, 구마모토현, 야마구치현 순이었다.

마구평 평야지대. 1900년대 초부터 마구평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초지를 매입해 농지로 조성, 쌀 농장을 경영했다.

일제기의 연산

연산지역 첫 일본인 이주는 1907년 아이치(愛知)현 출신 시라이(白井和吉)였다. 이후 일본인들의 진출이 늘며 연산군청 주변에 행정, 금융, 통신, 치안, 교육시설이 들어섰다. 연산우편국(황산벌로 1530)은 군청 초입 오른쪽에, 금융조합은 왼쪽에 입지했으며 연산장 방향 가로변에 경찰지서가 현재의 연산북촌복지관에 자리했다. 1910년 우편국장에 구로노(黑野)가, 1915년에는 나가이케(永池)가 부임했다.

이에 앞선 고종 32년(1895)에는 지방제도 개정안이 반포돼 공주부(公州府)에 속하는 연산군(連山郡)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됐다. 일본인 인구가 늘며 치안이 중요해지자 1912년 8월 공주헌병분대가 지금의 황산벌로 1534번지로 옮겨왔다. 분대장은 헌병대위 우에다(上田)였고 하사와 상등병 10명, 보조원 13명이 근무했다.

일제강점기에 흔했던 풍경인 전통과 근대의 동거. 공주 옛 충남도청.

이 시기 연산에 교육시설이 없어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은 논산공립심상소학교나 강경공립보통학교로 통학해야 했다. 이에 1912년 3월 연산공립보통학교를 설립, 3학급 51명의 학생을 수용했다. 교장은 후쿠오카(福岡縣)출신 사사모토(篠本又三郞)였고, 한국인 이병호(李秉浩)가 부훈도(副訓導) 직급으로 근무했다.

연산금융조합은 일본인 금융기관과 한국인 금융기관이 합쳐져 1911년 6월 20일 설립됐고 이토(伊藤榮)가 이사를 맡았다. 1927년에는 권중학(權重學)이 조합장, 가토(加藤)가 이사를 맡았으며 예금 적립금 1만 3780원이라는 기록이 있다. 1922년 4월 18일 발행된 동아일보에 4월 10일 정기총회가 개최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연산금융조합

전통건축물인 아문과 근대건축물인 금융조합의 동거. 전재홍 2002년 사진.

연산금융조합 건물은 일제강점기 연산군청 내에 건축됐다. 해방 후 농협 건물로도 사용됐으며 지금은 대추판매점인 ‘중광상회’가 영업 중이다.

건물주가 전면에 처마를 내어 공간을 확장시켰다. 지붕소재는 아스팔트싱글이고 모양은 우진각이다. 건축물 소재나 형태로 볼 때 당시나 지금이나 관아와는 이질적인 풍경이다. 서양풍 연산금융조합은 군청 관아(官衙)에 입지해 현존 전통건축물인 아문과 동거를 하며 근대와 전통의 경관을 연출한다.

연산군청곡식창고

연산군청 아문 오른쪽에 위치한 곡식창고. 전재홍 2016년 사진.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곡식창고의 내부. 전재홍 2016년 사진.

1932년 연산군청 내에 건축된 창고로 곡식 저장이나 군청에서 사용하는 물품의 보관 등 다용도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소금창고로 사용됐고 한때 초등학교 교사로도 쓰였다.

1960년대에는 내부를 개조해 영화관과 공연장으로 사용했다. 내부에는 당시 설치된 3평 정도의 영사실 공간이 남아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주민 권민자(38년생) 씨도 젊은 시절 공연장을 찾았다고 회고했다.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인 ‘아트통품마을’로 사용되고 있다. 2014년에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해 지붕보수와 노후화된 일부 목재 비늘판벽을 교체하며 보강했다. 또한 주출입구의 위치가 남측에서 서측으로 변경됐다. 벽체 상부에 고창을 설치했으며 지붕은 목재트러스를 사용해 박공형태로 마무리했다. 지붕은 기와에서 금속판으로 교체됐다. <계속>

1965년 공개된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가  창고 내부에 붙어 있다. 신영균, 장동휘, 허장강, 황해, 이대엽, 송해, 황해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총 출동한 영화다.

전재홍  jhjun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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