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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보이'와 '팻맨', 그리고 한국인 피폭자들[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12>일제의 전쟁광기 끝낸 원폭투하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장 | 건축공학박사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세종포스트는 전 원장이 근대도시에서 발굴한 우리 삶과 문화, 식민지 질곡의 역사적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일본의 전쟁 광기를 잠재운 원폭 ‘리틀보이’와 ‘팻맨’에 대해 짚어본다. <편집자 주>

저녁노을로 붉게 물든 원폭돔. 1945년 히로시마현 물산장려관 상공에 투하된 원폭으로 순간 수만 명의 히로시마 시민이 즉사했다. 2014년 전재홍의 사진.
체코 건축가 Jan Letzel의 설계로 모토야스(元安) 강가에 1911년 건축된 물산장려관. 원폭 투하로 멀리 몇 채의 콘크리트 건물만 있어 완파된 시가의 모습을 보인다.
히로시마의 상징물이 된 원폭돔. 원폭이 투하된 두 도시의 원폭 관련 전시관에는 전쟁 발발에 대한 사죄와 원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원폭 피해만 부각할 뿐이다. 2014년 전재홍의 사진.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광기는 극에 달해 중일전쟁의 전선을 동남아까지 확대했다.

더 나아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이후 미국과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참패했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이 전쟁의 광기에 종지부를 찍는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 길이 3m, 지름 71cm, 무게 약 4t. 작은 소년이란 이름과 달리 폭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팻맨. 길이 3.2m, 지름 1.5m, 무게 약 4.6t, TNT 약 2.1만t에 해당. 원폭으로 약 3만 9000명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이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Fat Man'의 명칭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모습에서 유래 했다는 설도 있다.

때는 1939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독일이 원폭을 먼저 개발할 것을 우려, 원폭개발을 촉구하는 서신이었다.

암호명 ‘맨해튼 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그러나 일본은 격렬하게 대항하며 항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트루먼은 원폭 투하를 결정한다.

당시 티니안섬에 신병기 원폭의 실전 사용을 위해 B-29 폭격기 15대가 배치되었다. 원폭 적재를 위해 개조되었고 출격에 대비해 훈련 중이었다.

8월 6일 티니안섬을 이륙한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호’는 두 대의 공군기와 함께 히로시마(廣島)로 향했다.

비행 중 ‘리틀보이(Little Boy)’에 핵탄두가 장착되었고 목표지점 도착 30분 전 안전장치가 제거되었다. 일본은 3대의 비행기가 본토에 접근하자 공습경보를 발령했으나 소규모 편대라 곧 취소했다고 한다.

2009년 히로시마 첫 방문 당시 조선인피폭자협의회 이실근 회장을 만나 재일조선인 피폭자들을 원폭돔에서 기록했다. 2009년 전재홍의 사진.

오전 8시 15분, 9750m 고도에서 투하된 폭탄이 57초의 자유낙하 끝에 히로시마 상공 580m에서 자동 폭발하였다. 이때 발생한 버섯구름은 18㎞ 상공까지 치솟았다. 폭심지 반경 1.6㎞ 이내가 폭풍과 화재에 의해 괴멸되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를 약 25만여 명으로 추정하는데 사망자 7만 8000명, 부상자 8만 4000명, 행방불명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시민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셈이다. 이로 인해 파괴된 가옥수도 6만 호로 추정된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괘종시계가 11시 2분에 멈춰있다. 나가사키원폭자료관. 2014년 전재홍의 사진.
원자폭탄이 폭발하며 순간적으로 발생한 고열로 인해 쌀이 탄화되었다. 나가사키원폭자료관. 2014년 전재홍의 사진.

사흘 뒤 ’팻맨(Fat Man)’이 B-29 벅스카호에 실려 북큐수 공업지대 고쿠라(小倉)로 향했다.

소이탄의 연기로 시계가 좋지 않아 두 번째 목표지인 나가사키(長崎)가 대신 재앙을 맞는다.

11시 2분, 고도 9000m에서 투하한 원폭은 상공 500m에서 강렬한 섬광을 내며 폭발했다. 이로 인해 미쓰비시의 제강소, 조선소, 병기제작소 등의 시설이 회복 불능이 된다.

원폭투하중심지공원에 조성된 원자폭탄 희생자 봉안탑. 봉안탑 상공 500m 지점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2014년 전재홍의 사진.
원폭투하중심지공원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장식물이 걸려있다. 2014년 전재홍의 사진.

두 발의 원폭으로 양 도시에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시가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8월 9일 “전쟁의 괴로움을 빨리 끝내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사용했다”고 연설했다. 일왕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당시 원폭이 투하된 두 도시에 많은 한국인들이 끌려가 군수품 공장이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도 많았는데 사망자 5만 명, 생존자 5만 명으로 모두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생존자 중 4만 3000명은 귀국, 7000명은 일본에 잔류한 것으로 본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위령각의 유국자 씨. 1923년 합천 출생해 14세 때 부모와 함께 히로시마에 갔다. 군수품 통조림공장에 근무했다. 원폭 투하 당시 피폭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8년 전재홍의 사진.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위령각의 히로시마 피폭자들. 왼쪽부터 이원식(1928년생, 공장 노동자), 이봉문(1924년생, 징집돼 훈련 도중 피폭), 박남학(1922년생), 이옥선(1922년생, 가정주부로 집에서 피폭), 정정오(1927년생, 트럭 조수). 2008년 전재홍의 사진.
2009년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열린 원폭피해자 위령제에 참석한 가족들과 후손들. 피폭의 피해는 당대에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가며 후손들에게 악영향을 준다. 2009년 전재홍의 사진.

귀국한 피폭인들이 모여 일본 정부에 대해 배상과 치료를 촉구하기 위해 1967년 2월 11일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가 창립, 이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협회에 등록한 피폭자는 2000여 명에 불과하고, 대다수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미등록자이다. 1996년 10월 경남 합천에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개관되어 1세 피폭자들이 살고 있다.

이실근 히로시마현조선인피폭자협의회 회장. 2009년 전재홍의 사진.

2009년 7월, 일본 내 재일조선인 피폭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선 이실근 히로시마현조선인피폭자협의회 회장의 인터뷰와 피폭자들의 사진기록을 위해 히로시마를 찾았다. 이 회장은 1929년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출생한 재일조선인 2세이다. 1945년 8월 7일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귀가 도중 히로시마시에 들어가 피폭을 당했으며 그의 부인도 피폭자이다.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해 1996년 등재된 히로시마 원폭돔. 일본은 전쟁 발발의 책임은 회피하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아 돈벌이에만 급급하다. 2014년 전재홍의 사진.

 

전재홍  jhjun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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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 서영식 2018-05-23 18:26:30

    역사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시는 좋은 기사네요 ^^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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