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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무상파티론’은 이데올로기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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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무상파티론’은 이데올로기 공세
  • 박권일(시사칼럼니스트, 88만원 세대 공저자)
  • 승인 2014.11.24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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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소수의견 | 무상급식 예산중단 논란

한국 담세율이 북유럽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70년 전 스웨덴, 돈 많아서 무상급식 했을까?
오늘 한국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부자 증세’

얼마 전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무상급식 예산중단을 선언하고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국고가 거덜 나고 있는데 지금 무상파티만 하고 있을 거냐”며 학교급식 체제를 대놓고 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도지사 취임 당시 공약을 완전히 뒤집은 뻔뻔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현실에서 무상급식은 시기상조’라는 그의 주장이 극우매체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처럼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준표 지사는 담세율이라는 단어를 꺼내들어 시기상조론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면서 “담세율이 북유럽의 3분의 1밖에 안되는데 북유럽 수준으로 무상급식하자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얼핏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런데 담세율이 북유럽의 3분의 1이라는 말, 과연 ‘팩트’일까?

OECD 보고서와 같은 국가 간 비교 자료에서 국민의 조세부담은 같은 기준으로 비교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지표가 존재한다.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이 그것이다. 조세부담률은 국내총생산에서 국세와 지방세 등 조세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쉽게 말해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나가는 돈이다.

2013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21.4%이고 덴마크 38.2%, 스웨덴 42.9%, 핀란드 43.1%였다. 북유럽 3국 평균이 41.4%이므로 한국 조세부담률은 최소한 북유럽 3국 수치의 절반 이상이다. 그런데 실제 국민들의 부담을 더 정확히 측정하려면 이것만으론 좀 부족하다. 국세와 지방세 뿐 아니라 사회보장기여금 부담까지 포괄해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게 국민부담률이다. 스웨덴의 2012년 국민부담률은 44.3%, 한국은 26.8%였다. 이 경우에도 한국의 비율은 스웨덴 수치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다. 즉, 조세부담률로 보든 국민부담률로 보든 “3분의 1”이라는 비율은 나오지 않는다. 대체 “3분의 1”이라는 수치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되레 묻고 싶어진다.

스웨덴이 복지국가 체제를 완성시켜가던 1965년, 국민부담률은 33.3%였다. 지금 한국의 국민부담률과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스웨덴 전체의 경제규모나 국민 개인의 소비수준은 현재 한국에 비할 바 없이 영세했다. 스웨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선 때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2013년 현재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4000 달러 남짓이다). 더 놀라운 건 스웨덴이 ‘중학교까지의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한 때가 무려 1946년이었다는 사실이다. 1940년대 스웨덴에 돈이 너무 많아 그랬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국고는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 스웨덴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보편복지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지 돈이 남아돌아서가 결코 아니었다.

사실 스웨덴과 한국은 많은 면에서 다른 사회다. 따라서 ‘스웨덴은 이런데 우리는 왜 이러냐’는 식의 평면적인 비교는 늘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북유럽과 한국을 비교하며 논의를 먼저 꺼낸 것은 홍준표 지사였다. 통계를 직접 찾아보니 수치가 사실에 부합하는지조차 매우 의심스럽다. 뿐만 아니라 통계를 찾아보면 볼수록 그 옛날 스웨덴에 비해 한국은 지금 당장 중학교까지 무상급식을 확대해도 될 정도로 돈 많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홍준표 지사의 말마따나 “국고가 거덜 났다면” 왜 국고가 거덜 났고 어떻게 해야 채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왜 국고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4대강 같은 토건사업, 혈세를 허공에 뿌린 아둔한 자원외교 같은 수많은 정책실패들이야말로 핵심원인이다. 게다가 돈이 남아도는 소수의 부자들, 국내투자를 외면하는 대기업의 세금은 팍팍 깎아주니 세수가 늘어날 리가 만무하다. 문제의 원인과 이유는 따로 있는데, 엉뚱하게도 아이들 밥값에 트집을 잡는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주장이 어떤 설득력도 결여한 이데올로기 공세인 까닭도 여기 있다.

1929년 대공황이 터진 후 몇 해 남짓 지나, 미합중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을 선언한다. 뉴딜을 단지 경기부양으로만 보기엔 무리가 다소 있지만, 어쨌든 전례 없는 규모의 경기부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파산하고 거리에 나앉는 경기침체 국면, 침체를 회복시키려면 대가가 따른다. 루즈벨트는 연방정부 예산을 세 배 가까이 올려 잡는다. 기업의 법인세, 상속세, 소득세, 초과이윤세 등이 큰 폭으로 인상됐다. 그 결과 1933년 15억 달러였던 연방정부 조세규모가 1940년엔 53억 달러 가량이 되었다. 극소수 초고소득자에게는 90%가 넘는 소득세가 매겨졌다. 부자들이 극렬하게 반발하자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뉴딜을 하는 것은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다. 드디어 대결의 때는 왔다. 특권계급은 단결해 나를 증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한다.” 오늘의 한국에 절실히 필요한 것도 바로 “대결의 때”, 즉 부자증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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