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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우면서 서늘하고, 지적이면서 광포한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4.05.09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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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미국의 목가 1, 2

미국적 가치의 전복 그린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작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는 영국 일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는 영국 일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목가>가 내가 60년간 써온 30여 편의 소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1973년의 필립 로스 ⓒwikipedia

삶은 인과관계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어떤 결과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다양하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며, 추정된 인과성이란 것도 기실 관습이거나 착오이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의로 가득한 삶이 고통의 징벌을 받는 성경 속 욥의 이야기에 전율하면서도 매혹된다.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필립 로스의 대표작 <미국의 목가>가 국내 초역됐다. 유대인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유대인 작가에서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를 쓰는 미국의 대표적 작가로서 필립 로스의 오늘날 위상을 만들어준 작품이다. 이로써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으로 이어지는 그의 ‘미국 3부작’이 국내에 모두 번역됐다.

"사람들은 역사를 장기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사실 아주 갑작스러운 것이다. 〔…〕 나는 어쩌다가 역사의 노리개가 되었을까." 소설의 주제는 소설 속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잔혹성’과 ‘부당성.’ 인간의 이 보편적 진리가 역사와 만나 20세기 미국의 욥을 풍비박산 내는 잔혹하고도 비통한 서사가 유려하면서도 장대하게 그려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시모어 ‘스위드’ 레보브라는 이민 3세대 유대계 미국인이다. 금발에 푸른 눈, 시리도록 하얀 피부를 가졌다고 해서 ‘스위드’(스웨덴인)라는 애칭으로 불려온 그는 뉴저지주 뉴어크의 작은 마을에서 ‘완벽한 인간’으로 신격화한 소년이었다. 아름다운 육체에 온화하고 침착한 성품, 어떤 운동경기에서 뛰어도 최고의 실력으로 팀 승리를 이끌었던 이 전설적인 소년은 할아버지 대부터 일군 가죽장갑 공장을 물려받아 기업가로 승승장구한다. 미스 뉴저지 출신의 아름다운 아내, 말더듬증이 있지만 사랑스럽고 똑똑한 딸 메리,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전원주택. 모든 것이 완벽한 목가적 삶이다.

소설은 죽음을 앞둔 노년의 스위드가 유명 소설가가 된 고교 후배 네이선 주커먼(필립 로스의 많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을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던 이 신화적 인물은 그러나 엉뚱한 자기 자랑만 늘어놓다가 돌아가 버리고, 주커먼은 이 진부한 인물에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몇 달 후 고교 동창회에서 스위드의 동생 제리로부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스위드가 이룬 성취의 총화였던 딸 메리의 반전 폭탄테러로 산산조각 난 그의 목가적 삶까지.

필립 로스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각권 1만3000원
필립 로스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각권 1만3000원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살아서 아무것도 털어놓지 못했던 스위드의 고통은 주커먼에 의해 이제 하나의 소설로 재구성된다.

소설은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반정부·반체제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가던 1960년대를 배경을 ‘미국적 가치’가 창졸간에 붕괴되고 전복되는 시대적 참사를 한 가정의 연대기를 통해 그려낸다. ‘미국에 대한 격렬한 증오가 병으로 자리 잡은 딸’과 ‘미국인 것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애증은 단지 세대갈등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핵심적 모순 속으로 돌진하기 위한 서사적 도구다.

"미국을 싫어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피부 속에서 살듯이 미국 속에서 살았다. 그들의 부(富)가 삼대에 걸친 무제한의 근면 외에 다른 어떤 것의 산물이라도 되는 양 ‘자본가’ 부모를 욕할 수 있는가? 그는 아이가 싫어하고, 인생의 모든 불완전한 것들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폭력적으로 뒤집어엎고 싶어 하는 미국을 사랑했다. 그는 아이가 싫어하고 조롱하고 전복하고 싶어 하는 ‘부르주아적 가치들을 사랑했다."

천사 부모에게서 태어난 괴물 같은 딸은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이고 25년간 부랑자처럼 숨어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래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아버지는 이중생활의 고통 속에서 ‘상처를 벌려놓은 채’ 살아간다. "스위드는 삶이 가르쳐줄 수 있는 최악의 교훈을 배웠다.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배우게 되면 행복은 두 번 다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없다. 행복은 인위적인 것이 되며, 그나마도 자신과 자신의 역사와 고집스럽게 거리를 두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울분의 힘으로 서사를 밀고 가는 필립 로스의 문장들은 몰락의 파도가 휩쓸고 간 비극의 잔해를 차분하게 응시하면서 잦아든다. 크게 내려다보지만 섬세하게 살펴보는 대가적 풍모가 근 이십 년 전 작품이지만 이미 그에게 있다. "그래, 우리는 외롭다. 몹시 외롭다. 그리고 늘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 짙은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메리. 외로움에 대해서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어. 역사상 어떤 폭파운동도 거기에는 흠 하나 내지 못했지. 인간이 만든 폭약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도 그것을 건드리지는 못한단다." 뜨거우면서도 서늘하고, 지적이면서도 광포한 소설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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