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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글쓰기 스타일까지 못 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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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글쓰기 스타일까지 못 훔쳐”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4.04.22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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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편집자·독자에 쓴 편지 68편

좋은 글쓰기 필수 요소 등 담아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어도 숭앙해야 마땅할 일급의 작가들이지만, 하루키가 열혈 팬임을 여러 차례 공표했기 때문에 더더욱 숭배 받게 된 작가들이 몇 있다.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도 그 중 하나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라는 <노르웨이의 숲> 속 대사 때문에 한국에서 피츠제럴드가 널리 읽히게 된 것은 탄탄한 고전 소양을 갖춘 독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피츠제럴드 자신조차 불쾌하게 여길 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부인할 수 없이, 오늘날 한반도에 미치는 ‘하루키 파워’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추리소설의 정통 독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법한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들을 엮은 서간집이다. 수많은 에세이에서 챈들러에 매료되었고,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공표해온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책은 챈들러가 작가, 편집자, 기자, 감독, 독자들에게 쓴 편지 중 68편을 골라 엮었다. 동료·선후배 작가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독설, 곳곳에서 키득거리게 만드는 위트와 유머, 추리소설을 2급의 장르문학으로 치부하는 미국 문단에 대한 작가로서의 고고한 자존심과 결기, 30년을 해로한 아내의 죽음에 맞선 사랑과 순정 등이 날것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독서의 온습도가 순식간에 올라가는 뭉클한 순간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스타일과 매력이고, 그것은 결코 모방되지 않는다는 챈들러의 말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챈들러는 지나친 음주와 업무태만으로 석유회사 부사장 자리에서 해고된 후 열일곱 살 연상의 아내와 태평양 크루즈여행을 하다가 불현듯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나이 44세. 첫 장편 <빅 슬립>이 나온 것은 51세 때였다. 책은 챈들러의 작가론·작품론을 모아 놓은 1부와 다양한 작가들에 대해 직정적인 호·불호를 논하는 2부, 시나리오 작가로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창작의 자유에 대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웠던 할리우드 시절을 담은 3부, 그의 대표적 탐정 캐릭터인 필립 말로에 대해 작가 자신이 서술하는 4부, 그의 일상적 삶에 관한 기록들을 모은 5부로 구성됐다.

추리소설에 대한 각별한 취향이 없는 독자들도 사로잡을 만한 이야기들은 역시 1부 ‘작품론’과 5부 ‘일상’ 범주에 묶여 있다. "좋은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추출해야 하지요. 아무리 말을 아껴도 장기적으로 보자면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스타일이고, 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라는 언급이나, 표절에 관해 "작가의 스타일까지 훔칠 수는 없다. 대개는 누군가의 결점만 훔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드러나듯이 스타일은 챈들러 예술론의 핵심이다.

탐정소설을 정의하는 대목에서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그의 주인공 필립 말로의 이야기는 "정직한 사람이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다. "성공이란 언제 어디서나 부정한 돈벌이이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에서 적절한 풍족함을 누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다.

챈들러는 "삼십 년 동안 내 심장박동이었던" "아주 오래, 아주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했던" 아내 시시가 폐섬유증으로 죽은 후 극심한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으로 망가진다.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것조차 배신인 것 같았"던 어둠의 시간을 거친 후 다시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청혼했던 여인에게 결혼 승낙을 받은 후 돌연 숨을 거둔다. 챈들러 최고작으로 평가 받는 <기나긴 이별>은 그 스스로 일컫길 "아내가 조금씩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봤고, 그 사실을 안다는 고뇌 속에서 최고의 책을 써야 했으며, 그럼에도 써 냈던" 책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서재에 들어가 눈을 감고는 생각을 모아 스스로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지요. 그러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습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을 가진 탐정의 모델,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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