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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가(國歌)도 혁명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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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가(國歌)도 혁명노래
  • 송전(한남대 사회문화대학원 공연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4.04.2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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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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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5·18기념곡 논란

‘라 마르세이예즈’도 혁명세력 애창곡

4월 초가 되면 필자의 기억 밑바닥에서부터 조용히 올라오는 기억들이 있다. 젊은 날 지금은 세계적인 연극의 거리로 바뀐 서울 대학로를 흐르던 작은 개천(일명 세느강)가에 무성한 개나리와 벚꽃 그리고 그 하얗고 노란 색깔 사이에 흐르던 알 수 없는 묘한 흥분감이 그것이다. 3월 초에는 여전히 궁박한 냉기가 몸에 배어 있다가, 4월이 되면 비로소 움츠렸던 어깨를 곧게 피고 걷기 시작하게 되고 그때 꽃 소식이 캠퍼스 안에 슬며시 전해졌던 것이다.

그 시점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퍼져 흐르곤 했다. 1960년 4·19 ‘혁명’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흥분이었다. 교정 안에 있던 자그마한 4·19 의거 기념탑 앞에 아주 소박한 꽃다발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심스럽게 놓여졌다. 1970년대 초는 당시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된 시점이었고, ‘개헌’이라는 단어만 입에 올려도 무기징역 이상의 형벌로 징치(懲治)하던 무시무시한 ‘긴급조치’의 시대였다. 그때 그 학교 정원에서 소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그건 몇 명의 열혈학생들이 기껏해야 유신헌법의 반민주성을 알리는 전단을 살포하는 것에 불과했다. 기존 법원체계를 정지시킨 군사재판부는 그들에게 사형부터 무기징역까지 언도했다. 야만의 시대였다.

요즘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프랑스는 혁명세력의 애창곡 ‘라 마르세이예즈’를 국가로 채택했다. 사진은 ‘의용군의 출발(라 마르세이예즈)’ 프랑수아 뤼드(Fran  ois Rude), 파리 개선문 위에 부조, 1833~1836년, 128×7.93㎝, ⓒphoto by Tom Radulovich(wikimedia)
요즘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프랑스는 혁명세력의 애창곡 ‘라 마르세이예즈’를 국가로 채택했다. 사진은 ‘의용군의 출발(라 마르세이예즈)’ 프랑수아 뤼드(Fran ois Rude), 파리 개선문 위에 부조, 1833~1836년, 128×7.93㎝, ⓒphoto by Tom Radulovich(wikimedia)

그랬기에 당시 ‘혁명’이라는 단어는 사전에만 들어있는 단어였을 뿐 일상어로서의 사용이 금지된 어휘였다. 혁명이란 그렇게 불온한 단어이다. 그런 혁명의 열기도 시간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이제는 4월이 와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았던 4·19 의거의 그 열기가 다시 솟아나지 않는다. 그저 한 의미 있는 사건을 되뇌는 행사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혁명은 집단기억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영원한 강물이랄 수 있고, 이 강물은 전혀 흔적도 소리도 내지 않다가 어느 순간 밖으로 솟아나는 용출(湧出)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사회변혁의 화산폭발과도 같은데 사실 혁명을 직접 다룬 드라마는 흔치않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을 극화한 독일의 천재작가 뷔히너(1813-1837)의 <당통의 죽음>(1835)은 세계문학사의 귀중한 자산이다. 유럽세계를 흔들어 놓았던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 정치범들의 감옥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리 시민들이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799년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올라선 나폴레옹이 혁명의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 십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혁명의 피바람에 희생되었다.

24세의 나이로 요절한 뷔히너는 그의 나이 22세 때 <당통의 죽음>을 썼는데, 당시 유럽은 여전히 격동 상태였고 특히 뷔히너의 조국인 독일의 여러 열방국들은 왕의 절대 권력을 산산조각 낸 프랑스 혁명의 열기를 어떻게 제어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모든 개혁세력에 대해 가차 없는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당시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생이었던 뷔히너는 시세말로 운동권 학생이었다. 대학 안에서 정치서클을 만들었다가 탄압을 당하게 되자 도피를 할 수밖에 없었고 도피 자금을 마련하려고 불과 한 달 사이에 써 내려간 작품이 바로 <당통의 죽음>이다.

이 작품 안에서 뷔히너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노선에 대해 회의를 품은 당통의 고뇌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자연계의 화산폭발이나 쓰나미 같은 것이어서 인간의 희생은 불가피하며 때문에 제정(帝政)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공화국의 힘은 미덕이요, 공포는 공화국의 무기이다! 미덕은 공포를 수단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반혁명세력을 가차 없이 처단한다. 폭력적인 도덕정치를 표방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통 파의 이론적 대변자라 할 수 있는 까미유 데물랭은 "우리는 벌거벗은 신들과 바쿠스의 무녀와 올림포스의 유희를 원한다"며 공화국의 문지기는 이성적 향락주의자였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와 예쁜 엉덩이를 지닌 비너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 민주주의자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에게 혁명은 인간제물을 매일 먹어야 하는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것이며 이는 비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것이기 때문에 혁명의 발걸음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당통은 부패한 향락주의자,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그들의 일파와 함께 단두대의 제물이 되고 만다. 그로부터 단 2개월 후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뷔히너는 당통을 통해 나중에 중요한 현대철학의 테마가 된 ‘무위(無爲) 허무(虛無) 권태(倦怠)’의 개념을 형상화하여 현대를 선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 시 단두대 처형이 벌어질 때 모여든 관중들은 <카르마뇰>이라는 활달한 노래를 부르고 이에 맞춰 집단무를 추며 환호했다. 프랑스 황제인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앙투아네트를 조롱하는 이 노래는 일종의 카니발 주제곡이었던 셈이다. 나중에 권력자가 된 나폴레옹은 이 노래를 금지시켰다. 요즈음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민주화운동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문제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노래가 일부의 국민에게 여전히 불온한 노래인 모양이다. 프랑스 혁명 세력의 애창곡이었던 <라 마르세이예즈>가 국가(國歌)가 된 프랑스 국민들은 그 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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