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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슬기 슬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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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슬기 슬기 사람’
  • 석길암 교수(금강대 부교문화연구소)
  • 승인 2013.12.15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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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그리고 사람살림 | 당신 자신에게 남는 시간을 허하라

인간, 도구 사용→시간 창출→상상력 키워
사람이라면 ‘잉여시간’ 즐길 권리 당연


‘슬기 슬기 사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류를 학문적인 분류에 의해 부르는 종(種) 이름이다. 통상적으로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데, 그것을 한글로 번역해서 부르는 명칭이 바로 ‘슬기 슬기 사람’이다. ‘사람’ 혹은 ‘인간’에 속하는 종족 중에서도 슬기롭고 슬기로운 종족이라는 의미다.

지구상에는 3~4만 년 전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전의 ‘사람’에 속하는 종족과는 달리 훨씬 더 정교하게 만든 돌 도구를 사용했으며, 동굴 벽화를 그리는 것과 같은 상상력과 예술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종족이라고 한다.

결국 좀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고, 상상력과 예술성을 발휘했다는 것이 사람의 종족 속에서 현생 인류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었던 셈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좀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은, 좀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있었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생존보장을 위해 고안해낸 좀 더 정교한 도구가 의외의 선물을 제공했다. ‘남는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맞다. 우리가 늘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그 ‘여가시간’ 혹은 ‘여유시간’이라는 것이다. 생존이라는 절대적이고 절박한 명제에 오랜 시간을 시달려 왔는데, 잠시이긴 했겠지만, 그 절박한 명제에서 벗어나 있는 ‘남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 남는 시간은 의외로 고민거리가 아니었을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노는 것도 놀아본 놈이 더 잘 노는’ 것이니, ‘남는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시간을 잘 때울 턱이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간을 잘 때우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른바 ‘상상하기’이다.

‘저 노루 한 마리를 잡아야만 내가 내일 살아있을 수 있다’가 아니라, 이미 잡아놓은 노루 한 마리로 배를 채웠기 때문에 혹은 내일을 위해 대비해둔 먹거리 때문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던, ‘남는 시간을 가진 자’가 ‘내가 어떻게 그리 쉽게 노루를 잡을 수 있었던 거지?’ 혹은 ‘만약 내일 노루 열 마리를 잡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던 셈이다. 결과론적으로 그것은 더 정교한 도구의 개발로 이어졌고, 더 많은 ‘남는 시간’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더 많은 남는 시간은 상상력과 예술성의 계발로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발휘되었던 ‘상상하기’ 곧 ‘생각하기’가 이른바 고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을 만들어냈던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쨌든 추정에 불과한 이야기이니 정답은 없을 것이고, 필자는 이 ‘슬기 슬기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특징으로 ‘남는 시간’을 지목한다. 남는 시간 때우기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람다운 삶’을 만들어낸 결정적인 동기가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농담이긴 하지만, 고래로 철학자나 예술가 치고 게으름뱅이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답이 저절로 주어지는 듯도 하다. 혹은 남는 시간에 잡생각이나 하라고 ‘성스러운 임무’를 받았던 구성원이 새롭게 사람이라는 종족의 공동체 내부에 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생존이라는 절박한 명제에서 벗어난 첫 번째 직업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한 책무와는 전혀 다른 책무를 가진 공동체의 구성원이 생겨났던 결과가 된다. 모든 시간을 생존에 투여해야 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라는 두 부류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점차 모든 시간을 생존에만 투여해야 하는 이들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남는 시간의 정도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점차 정교해지는 도구 덕분에 높아진 생존확률이 더 많은 구성원들에게 남는 시간을 제공해주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남는 시간’ 혹은 ‘남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된다.
생존을 위한 체력을 재충전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은 생존의 도구를 고민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마냥 퍼져서 잠자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속된 말로 그냥 멍 때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의 시간 때우기가 되었든 간에 남는 시간은 그야말로 그들에게 ‘나머지’였을 것이다. 그 나머지 시간이 잘 활용되었든 아니든 간에, 그 결과로 등장한 종족이 바로 ‘슬기 슬기 사람’인 것이다. 때문에 필자는 ‘슬기 슬기 사람’의 가장 큰 덕목을 ‘남는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시대를 바꾸어서 오늘의 우리를 살펴보자. 우리는 ‘슬기 슬기 사람’처럼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좀 더 쉽게 던지자면 이렇게 되겠다.

"우리는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답게 그들의 가장 큰 덕목인 남는 시간을 누리고 있는가?"

저마다의 답변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답변은 ‘아니올시다’이다.

고대사회나 중세사회에서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근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생존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에 투여해야 하는, 그래서 생존보험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자본을 확보하는데 바쳐야 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근대 이후 산업사회의 발전을 추동해왔다고 하는 ‘자본’이라는 것은 ‘권력’과 결합되어 있다. ‘자본’이 ‘권력’인 사회, ‘자본’이 ‘권력’과 결합한 사회 곧 ‘권력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향유할 수 있는 ‘자본’이 충분하게 주어지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권력자본의 몫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고, 분배의 권리를 가진 권력자본이 그것을 허락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의 노동자에게는, 남는 시간은 가진 자들의 것일 수밖에 없고, 남는 시간은 절박한 생존에 비교하면 사치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만약 당신이 휴가를 갔을 때조차도 시간에 쫓기고 있다면, 당신은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규정된 업무시간이 끝난 뒤에도 노동 중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다면, 당신은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강요당해온 삶의 구조적인 강박의 경험 때문에, 당신의 자식들에게도 좀 더 거기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강요하고 있다면, 당신은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사회구조 속에서 ‘남는 시간’을 가진 권력 자본에 속하기 위해서 당신의 ‘남는 시간’을 재투자하고 있다면, 당신은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아니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당신은 이미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되기 위해 당신의 ‘남는 시간’을 투여해야 하는 부조리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는 말한다. 당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부처였다고.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남는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성스러운 권리를 부여받은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일 수밖에 없다. 슬기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일 수밖에 없는 당신을 위해서 제발 당신 스스로에게 ‘남는 시간’을 허하라.

달콤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을 왜 당신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가?

달콤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을 당신에게 허용하는 사회적 장치를 왜 당신에게도 주변에게도 허용토록 요구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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