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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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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 강수돌(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 승인 2014.07.22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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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사회 | 사회적 부모

"‘내 아이’ 아닌 ‘모든 아이’ 잘 키우자" 개념
우열 경쟁 아니라 자부심·겸손함 길러줘야

어떤 시민 강의에서였다. 아이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한 교육이 되려면 부모 자신이 ‘개별적 부모’로 머물러 있기보다는 ‘사회적 부모’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에 50대 중반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그 말에 공감한다면서도 진지하게 물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우리 세대와는 달리 상당히 이기적이잖아요? 자기에게 좋은 것만 찾는 식으로… 그런데 자기 자식에게 하는 걸 보면 도무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헌신적인 거예요. 뭐, 유기농 먹을거리에서부터 옷이나 책 하나 고르는 것도 얼마나 철저한지… 이런 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사회적 부모’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우선, 사회적 부모란 어떤 사람일까? 약 3년 전, 대안교육 전문지인 <민들레> 72호에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특히 김광하 님의 글 참조).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자녀 교육을 ‘내 아이’ 잘 키우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 잘 키우기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마을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살갑게 대하며 뭔가 말을 걸어주거나 또 아이가 물어올 때 친밀하고 진지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또, 아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마치 내 자녀처럼 잘 대하고 또 아이들과 수평적인 소통을 해보는 것이다. 요즘 같이 왕따 현상이나 학교 폭력이 큰 문제로 대두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내 아이만 쳐다보고 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내 아이가 만나는 모든 아이들이 다 잘 자라야 내 아이도 폭력에의 두려움이 없이 생활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 내 아이조차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작아진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이성 친구를 사귀거나 배우자를 데리고 왔을 때도, 다른 건 몰라도 인성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데리고 올까봐 두렵거든, 지금부터 ‘내 아이’ 중심이 아니라 ‘우리 아이’라는 개념으로 교육에 접근해야 한다. 나아가 교육의 근본 원리를 우열로 경쟁시키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자부심과 더불어 겸손함을 같이 길러주는 패러다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데에 공감하고 그런 변화를 만드는 일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참여해야 한다. 사회적 부모로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편협한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질문하신 분은 굉장한 역설 또는 딜레마에 주목했다. 젊은 엄마들이 상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기 아이에게만큼은 대단히 헌신적인 모습, 이건 매우 역설적이다. 하지만 곰곰이 보면 이런 모습조차 살벌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개별적 전략의 소산인 것 같다. 우선, 젊은 엄마가 보이는 이기적 모습이란 결국 온 사회가 인간적 유대감을 상실하고 공동체적 관계가 해체된 결과가 아닌가? 또, 그런 상황에서 자기 아이에게 쏟는 과도한 헌신성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진 사랑의 힘을 아주 좁은 영역만으로 배출한 결과이기도 하고,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이에게 투입하여 아이만큼은 이 치열한 ‘팔꿈치 사회’에서 탁월한 승자가 되기를 갈망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옆 사람을 팔꿈치로 쳐내야지만 내 생존이 보장되는 이 무서운 ‘팔꿈치 사회’에서 승자 그룹에 들기보다는 패자 그룹에 들기 쉽다. 패자 그룹에 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상시적 열등감에 시달린다. 감추고 싶은 내면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것을 극복할 방안은 별로 없다. 이 상황에서 ‘내 아이’를 승자로 키우는 일이 대안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극도로 헌신하는 학부모가 생긴다. 그렇다고 승자 그룹에 든 이들은 편안할까? 아니다. 그들은 기득권의 달콤함에 중독되면서도, 행여 자신조차 갑자기 패자 그룹으로 탈락하지 않을까, 혹시 내 자식이 패자 그룹에 들게 되면 얼마나 체면 구기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래서 이들 역시 자식을 닦달한다. 겉보기엔 헌신적인 부모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일류’를 향한 극도의 강박증을 보인다. 요컨대, 팔꿈치 사회의 승자나 패자나 모두 자식들을 승자 그룹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희생시켜 자식을 승자로 만들려는 모습이나 아니면 자식의 삶이 가진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자식의 삶을 희생시키는 모습, 이 두 가지는 모두 자신이나 타인의 삶을 식민화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삶의 식민화’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 가진 독자성을 인정하되 더불어 사는 것이 대안이다. 그래서 외친다. "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다시금 사회적 부모로 가보자. 이제 어렴풋이 정리가 된다. 나부터 편협한 자아가 아니라 사회적 자아로 거듭나면서도, 내 아이의 삶에 간섭하는 부모가 아니라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삶이라는 여행의 동반자이자 아이가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랑을 주는 멘토 역할을 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내 아이와 관계 맺는 친구나 동료, 이성 친구들에 대해서도, 나아가 이 사회의 모든 아이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떻게 해야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그렇게 가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 이웃이나 친구들과 더불어 고민하고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사회적 부모들이 온 사회에 넘쳐나게 될 것이다. 행복 사회는 그렇게 서서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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