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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로 당신의 생각을 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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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로 당신의 생각을 전합니까?
  • 석길암 교수(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 승인 2013.11.15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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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그리고 사람살림 | 소셜네트워크

현장, 불교경전 번역작업에 공동작업자 다수 참여
다른 문화권 언어 옮기는 과정 오류 최소화 의도
인도 승려 유기난, 세련·우아함 원뜻 왜곡 경계
이해 쉬우면서 의미 잃어버리지 않는 전달 중요

번역 혹은 통역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그래서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역할을 한다. 번역 혹은 통역이 잘 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상대방의 의사를 납득하는 정도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굳이 다른 언어 간의 번역이나 통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도 많은 장애가 존재한다. 정확한 어휘의 선택도 중요하고, 그 어휘에 적절한 태도 곧 몸짓의 선택도 중요하며, 그 어휘가 등장하는 장소의 분위기도 역시 중요하다. 곧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정말 여러 가지 조건이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한마디의 말조차 필요 없이 바로 자신의 마음이 전달되는, 이른바 이심전심도 있겠지만,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오해 없이 전달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떤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내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또 어떻게 들어야 상대방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받고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은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불교라는 종교가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불교가 인도에서 만들어지고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파된 종교라는 사실을 잘 안다. 인도에서 만들어졌으니, 불교의 원어 역시 인도어 그것도 고대 인도어 중의 하나인 산스크리트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라고 하면 곧장 한문을 떠올린다. 불교의 원어가 산스크리트어인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의 언어는 한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도 산스크리트어만 불교의 언어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프라크리트(중인도 아리안어), 카로슈티 문자, 산스크리트, 브라흐미 문자로 쓰인 서역의 호탄어 등 다양한 문자로 기록되다가, 불교의 중국 전파를 계기로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업은 2세기 중반 무렵에 시작하여 13세기 무렵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때로는 집중적으로 때로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인도어나 서역어로 쓰인 불교 경전의 한문번역 작업이 무려 1천여 년 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문헌의 한문 번역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가장 오랜 동안 진행되었으며, 가장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에 의해서 진행되었던 사업이기도 하다.

<서유기>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는 현장 스님은 인도에 유학하고 난 뒤에 귀국하면서 방대한 불교문헌을 가지고 와서 약 20여 년 동안 번역에 종사하였는데, 현존하는 한문번역 불전의 30%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이른다. 그런데 이 방대한 분량의 번역을 현장 스님 혼자서 완성한 것은 아니다. 현장 스님은 일종의 번역공동체의 대표자였다. 현장 스님이 산스크리트본 불전을 읽고 한문으로 번역하면, 그것을 받아 적는 사람, 의미가 통하는지 확인하는 사람, 번역된 한문문장을 산스크리트로 재번역하여 확인하는 사람, 문장을 다듬는 사람 등이 있었다. 다양한 전문적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번역작업에 참여하는 이른바 공동번역의 의미가 훨씬 강했던 것이 1000여 년 동안 이루어진 불전 한문번역의 특징이다.

이처럼 공동 번역을 시도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현장 스님과 같은 대표 번역자를 돕는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번역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번역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사람도, 사회구조도,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도, 단어가 지칭하는 의미도 다르다는 것이다. 곧 삶에 확연한 차이가 있는 다른 문화권의 생각을 또 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언어로 번역하여 옮긴다는 것은,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류를 빚을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에, 전문적인 역할을 나눈 공동번역작업을 통해서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현장 스님이야 당나라라고 하는 거대 제국의 국가적인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같은 작업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초기의 번역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초기의 번역자들이 고민했던 것 중의 하나는 질박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전달하는 소박한 번역에 충실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의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우아하고 세련된 문장을 사용한 번역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200년대 초반에 지겸이라고 하는 스님의 번역장에 참여했던 인도 승려 유기난(維難, Vighna)은 지겸 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그 의미만을 중시하고 표현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담겨있는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문장의 꾸밈과 관계없습니다. 다른 언어로 불경을 번역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해하기 쉬우면서, 그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번역은 잘된 것입니다."

물론 조금 더 세련되고 우아한 문장을 사용한다면 중국의 지식인들을 설득하기에는 쉬울지 모른다. 그런데 그 세련됨이, 그 우아함이 이해하기 힘들게 할 수도 있고, 의미를 오해하도록 할 수도 있다. 특히 중국인들의 문장에 있어서 우아하고 세련되었다는 것은, 고사성어를 적절히 잘 활용하고 꾸밈말을 잘 사용한다는 등의 의미가 강한 시대였다. 고사성어를 사용하면 그 고사성어의 맥락에서 이해하여 부처가 말한 본래 의미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고, 꾸미면 그 특유의 꾸밈 때문에 오해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뒤섞어서 전달한다. 아니 심하게는 우리의 판단이 오히려 경험을 압도하는 사실로 왜곡되어서 전달되는 경우가 더 허다하다. 사실에 자신의 경험치 혹은 판단이 더해져서 전달 내용이 왜곡되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 사실 혹은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때도 적용된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면서 거기에 자신의 생각에 공감하게끔 할 만한 부정적 요소 혹은 긍정적 요소를 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방식의 의사표현이 하나가 모이고 둘이 더해지고 셋이 함께 하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내서 서울 광장 한복판에 뛰어 놀게 된다. 요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애용하는 소셜네트워크를 떠도는 소문과 전설들이 흔히 그렇다. 물론 소셜네트워크에 올라오는 많은 정보들은 진정성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쉽사리 우리 주변을 파고들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의 속도 그리고 아주 쉬운 접근의 편의성이 만들어내는 장점과 단점을 우리는 일상생활 곳곳에서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가 침묵하던 다수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소셜네트워크의 편의성 때문에 얻어지는 속도 혹은 무책임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곤란을 겪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 기반의 가벼움을 만끽하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겠지만, 그것 역시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진정성을 담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인도 승려 유기난이 지겸에게 요청한 ‘이해하기 쉬우면서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전달’, 그것은 우리에게 꾸밈이 아니라 진정성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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