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태종의 최대 업적‘세자책봉’
상태바
태종의 최대 업적‘세자책봉’
  • 최민호(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 승인 2013.07.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종의 재발견 | 태종우(雨)가 내릴 때

독재군주 평가 속 왕조 기틀 마련한 현군 평가도
반대 무릅쓰고 3남 충녕 낙점한 이유는 ‘능력’
기우제 지낸 후 비오자 눈 감아, 태종우 유래


보물 제1804호인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종4년(1422년)에 세웠다. 문화제청 제공
보물 제1804호인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종4년(1422년)에 세웠다. 문화제청 제공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 고려충신 정몽주의 마음을 넌지시 시험하고자 읊은 이 시조가 바로 ‘하여가(何如歌)’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충신의 대명사 정몽주는 이렇게 답한다. ‘단심가(丹心歌)’라 하였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미움을 사며, 배다른 형제뿐만 아니라, 숱한 자신의 공신, 외삼촌 장인까지 죽여 가며 왕권을 강화시키려 했던 조선초기의 철혈군주였다.

태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철권정치에 독재군주라는 평가도 있지만, 불안정했던 조선 초기 왕조의 기틀을 굳건히 잡아놓은 현군명군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개인의 사병을 혁파하고, 역적을 색출하는 의금부를 만들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애로를 직접 청취하는 신문고를 만들었던 왕. 태종의 최대의 업적은 무엇으로 평가되고 있을까.

수많은 개혁정책 중에서 태종의 최대의 업적이라면, 단연 세종대왕을 세자로 책봉한 것을 꼽는다. 사실 세종은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나지는 못하였다.

태종의 3남. 이미 세자로 책봉된 양녕과 2남 효녕을 수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며 배제하고 나이 어린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오로지 태종의 결단이었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이유는 ‘능력’이었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일을 알며, 외교능력이 있는 재목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이후, 태종은 세종의 굳건한 기반을 위해 자신의 일등공신이자 처남 그리고 장인마저 사약을 내리며 장래 세종의 왕권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완벽하게 제거해 주었다. 그는 철저하게 세자를 교육하며 보호한다.

"이제부터는 세자를 만나려는 자가 있거든 초야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금지하지 말고 들어가 만날 수 있게 하라. 모름지기 세자로 하여금 깊이 인심을 얻게 하려는 것이 나의 뜻이다."

또한 왕위 승계과정에서 태종은 밀려있던 토목공사를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토목공사는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는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내가 다 감당하겠다. 세자가 즉위한 다음에는 한줌 흙이나 한조각 나무의 공사라도 하지 않게 하여 민심을 얻게 하겠다."

태종의 말년은 심히 괴로웠다. 온갖 등창과 병고에 고통을 당하였는데, 때마침 가뭄이 계속되어 농사마저 흉년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태종은 세종을 불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가뭄이 이처럼 심하니 내가 죽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상제(옥황상제)께 청하여 온 누리에 비를 내리게 하리라."

그리고 태종은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한 날 태종은 숨을 거두었다. 다시 말한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음력 5월10일이었다.

태종이 빌어 비가 내렸다 하여 그 후부터는 음력 5월 초열흘날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부르게 되었다.

태종은 개인적으로는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하고, 의리가 없는 왕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늘 국가의 안위를 우선하는 대의(大義)를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이러한 대의를 앞세우는 결단력과 훌륭한 후세의 왕을 만들어 국가를 지키겠다는 태종의 통찰력과 결행, 그리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백성을 지키겠다는 애민정신이 없었다면, 세종대왕이라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도, 한글 창제 같은 위대한 업적도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태종우가 내릴 때, 우리는 아버지 태종과 아들 세종대왕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Tag
#NUL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