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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눈물’이 ‘딸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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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눈물’이 ‘딸의 시대’를 열었다?
  • 김재중
  • 승인 2013.02.28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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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중 기자의 ‘우상과 왜곡’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事實)은 모두 진실일까.
사실과 진실은 대부분 부합하지만 간혹 사실로 믿고 있는 상식이 허구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사실에 ‘우상(偶像)과 왜곡’이 끼어들면 여지없이 거짓 상식이 탄생하곤 한다.
때문에 언론의 ‘사실 보도’란 것도 진실의 관점에서 보면 ‘우상과 왜곡’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때로 우상과 왜곡은 인간의 집단지성마저 마비시키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상식과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가장 큰 책무가 아닐까.
진보언론의 종가(宗家)였던 월간말부터 신생언론 세종포스트까지,
필자가 13년 동안 빼곡 히 적어놓은 취재수첩을 다시 꺼내드는 이유다.
<편집자 말>

박근혜 대통령 취임과 함께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조명되고 있다. ‘독재자’라는 부정적 이미지와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국부(國父)라는 긍정적 평가가 상존하지만, 후자의 이미지가 견고해지는 분위기다.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쓴다’는 말이 귓전을 맴돈다.
‘우상과 왜곡’이라는 주제로 연재 중인 기자의 낡은 수첩에도 ‘박정희’를 둘러싼 씁쓸한 기억이 담겨있다. 지난 2004년 말, 필자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소위 ‘안보교육’을 받으면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있던 정체불명의 글이 시민의 안보교육 소재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이런저런 인터넷 커뮤니티를 옮겨 다니며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눈물로 버무려진 역사왜곡

꽤 장문인 이 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 이후 미국과 서독을 방문했던 일화가 담겨있다.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라고 젊은 세대를 훈계하며 시작하는 글이다.
필자가 모두 거론하지 못할 정도로 이 글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에 의해 수차례 언급됐고, 각종 군 관련 안보강연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했으며, 박정희 독재논란이 일 때마다 반박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모 종편채널이 개국과 함께 반복적으로 활용한 소재이기도 하다.
장문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담겨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516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아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미국이 원조도 중단하고, 만나주지도 않자 박정희는 서러움에 북받쳐 수행원들과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에 나가있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나고 계속 눈물을 흘리자 당시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원조를 약속했으며 박정희는 서독 의회를 찾아가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을 빌려달라"고 연설했다.


글의 구성만으로 보면 꽤 감동적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낙후된 조국의 산업화를 위해 선진국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읍소해 오늘의 영광을 다지는 초석을 쌓았다는 일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같은 내용은 ‘우상과 왜곡’을 교묘하게 버무린 작문(作文)에 불과하다. 2004년 취재 당시 누가 어떤 의도로 이 같은 소설을 썼는지 상당부분 취재해 기사화했지만 이번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이미 상당수 국민들에게 왜곡된 사실이 진실로 이해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역사소설의 창작배경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낡은 취재수첩에 적힌 몇 가지 사실만 소개한다.

정사(正史)를 만드는 ‘힘’

먼저 박정희가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것은 1961년 11월 13일이었다. 1961년 11월 15일과 16일자 『조선일보』 1면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박정희와 케네디의 수뇌회담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케네디에게 문적박대를 당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왜 태어나게 됐는지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당시 박정희의 워싱턴 행적은 어땠을까. 당시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워싱턴에 나가있던 문명자 기자의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보면, 워싱턴을 방문한 박정희는 미국이 요구하지도 않는 베트남 전투병 파병을 약속하고, 쿠데타 집권을 보장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베트남 파병’을 지렛대 삼아 자신의 쿠데타 집권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 당시 박정희의 방미 목적이었다는 이야기다.
눈물로 읍소해 서독의 재정 원조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도 어불성설이다. 한국 언론은 박정희가 서독으로 떠나기 직전인 1964년 12월 5일 "서독이 한국에 재정원조 3900여만 달러를 약속했다"고 크게 보도했다. 서독방문을 통해 재정원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재정원조 약속을 받고 서독을 방문한 것이므로 선후가 뒤바뀌었다.
박정희가 서독 의회를 방문해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 주세요"라고 반복해서 연설했다는 이야기도 완전한 작문이다. 『조선일보』 1964년 12월 10일자 1면에는 「서독하원방문」 제목의 기사가 게재돼 있지만, 박정희의 연설에 관한 내용은 없다. 이 날 박정희는 하원의장의 안내로 2층 특별방청석으로 안내된 뒤, 환영 연설을 들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눈물’이란 출처불명의 글은 야사(野史)가 아닌 정사(正史)로 회자되고 있다. 왜일까.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과거 『인물과 사상』을 통해 지적했던 내용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박정희 미화 세력이 사회의 상층부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적 사실과 논리는 극소수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다 끝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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