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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선구자’ 만주에서 잉태된 친일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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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선구자’ 만주에서 잉태된 친일흔적
  • 김재중
  • 승인 2013.02.22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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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조두남의 만주행적, 진실을 밝히다(下)
▲ 아리랑만주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事實)은 모두 진실일까.
사실과 진실은 대부분 부합하지만 간혹 사실로 믿고 있는 상식이 허구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사실에 ‘우상(偶像)과 왜곡’이 끼어들면 여지없이 거짓 상식이 탄생하곤 한다.
때문에 언론의 ‘사실 보도’란 것도 진실의 관점에서 보면 ‘우상과 왜곡’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때로 우상과 왜곡은 인간의 집단지성마저 마비시키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상식과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가장 큰 책무가 아닐까.
진보언론의 종가(宗家)였던 월간말부터
신생언론 세종포스트까지,
필자가 13년 동안 빼곡 히 적어놓은 취재수첩을 다시 꺼내드는 이유다. <편집자 말>

"연변 음악계 원로 김종화 선생의 증언대로라면 선구자의 원곡인 ‘룡정의 노래’는 1932년이 아닌 1944년 영안극장에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그렇다면 조두남은 가곡 ‘선구자’의 작사가 윤해영과의 관계를 부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왜 ‘룡정의 노래’ 작곡시기를 10년 이상 앞당겨 1932년이라고 말했을까?

숨기고 싶었던 친일행적

1984년 조두남이 사망한 직후, 그와 친분이 깊었던 작곡가 김봉천씨는 월간 『음악동아』에 「카덴짜에 실은 자유인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고문을 게재한 바 있다. 기자가 국회도서관을 뒤져 건져낸 쓸 만한 국내 회고 글은 이것이 거의 유일했다. 그 중 한 대목이다.
"그 자신도 이들 작품(만주에서 만든 곡)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그런 작품이 있어!’라고만 말하면서 하염없이 먼 하늘만 쳐다보곤 했다. 짐작하건대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되살려 그 작품들을 다시 정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만주시절 음악작품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물으면 즉답을 회피하고 먼 하늘만 바라봤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조두남은 윤해영을 부정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과거에서 친일의 기억을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만주에서 작곡한 곡들을 되살려내지 않은 이유는 그 곡들이 바로 노골적 친일 시인인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인 곡들이었거나, 자신의 친일적 의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김종화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조두남은 윤해영의 친일시 「아리랑 만주」, 「락토만주」에 곡을 붙였고, 「징병제 만세」를 만들었으며 노골적 친일극 「스파이와 오도르」를 연출했다. 「산」 「그리움」 「제비」등 애수곡들은 역사에 남았고, 친일 곡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조두남의 만주행적이 비어버린 이유다.

1945년 여름, 영원한 이별

조두남의 노골적 친일행적에 대한 증언도 이어졌다. 해방직전 김종화 선생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생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사진재료조차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한번은 김종화 선생이 조선의 청진까지 재료를 구하러 갔다 온 일이 있는데, 남양에서 조두남의 공연 포스터를 목격했다. 일본어로 「스파이와 오도르」 ‘간첩이 날뛰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간첩이란 ‘항일 독립투사’를 의미한다. 조두남은 또한 「징병제 노래」를 작곡하는 등 일제말기 세태에 찌들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조두남은 "내가 지금 목단강에 돌아와 가극단을 새로 꾸리고 있는데, 긴상(김종화 선생)도 기타를 하려거든 나오구료"라는 내용의 편지를 김종화 선생에게 보내왔다. 그러나 가족 모두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김 선생은 조두남의 제의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이후 조두남은 새로 맞이한 아내를 데리고 김 선생이 있는 신안진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조두남, 그와 친분이 깊었던 ‘안’씨 성을 가진 의사와 셋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조두남과 김종화 선생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혁명의 고조기 때, 그것을 가지고 있어서는 정말 안되겠다 싶었지요."
2003년 김종화 선생 인터뷰 당시, 자리를 함께했던 부인 김금선 여사는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엄혹함 때문에 안 의사와 조두남, 김종화 선생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을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집에서 발견된 일기장까지 문제가 돼 곤혹을 치렀던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 유산계급의 지식분자 티가 나는 과거는 모두 지우는 게 상책이었던 셈이다.

해방과 분단은 또 다른 이별을 낳고

▲ 반도사화와 락토만주

김종화 선생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때가 영영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 패망과 더불어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또 다른 정치적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공산혁명과 남북분단, 그리고 전쟁의 참화가 찾아온 것이다. 조두남은 처가가 있는 서울에 머물다 전쟁 통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산으로 피난 간 뒤 아예 그곳에 정착했다. 역사의 격랑이 조두남을 만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마산으로 떠밀어 버린 것이다.
한편 ‘선구자’의 작사가 윤해영은 해방이후 특이한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락토만주」, 「아리랑 만주」, 「척토기」, 「오랑캐고개」등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친일시를 줄줄이 써대던 시인이 새로운 권력의 입맛에 맞춰 공산혁명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북인민행진곡」, 「동북인민자위군송가」 등 당시 만주와 북한 모두에서 애창되었던 이 노래는 윤해영의 가사에 김종화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였다. 김종화 선생에 따르면 윤해영은 1947년께 중국 내 친일파 처단이 격렬해지자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후 북한을 찬양하는 몇몇 노래의 가사를 썼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아마 북한에서도 제대로 발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란 게 김 선생의 추측이었다.
조두남은 남을, 윤해영은 북을 기반으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김종화 선생은 만주에 남아 음악 교사로 여생을 살아가게 된다. 역사의 칼날이 매정하게도 이들의 삶을 남과 북, 그리고 중국으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끝>

▲ 락토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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