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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줌마를 조심하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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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줌마를 조심하라?(2)
  • 강수돌(고려대 교수)
  • 승인 2012.08.29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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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인생은 아이 것, 부모 인생은 부모것!





나중에 아이가 부모탓 할까 걱정
아이 행복 말뿐 입시지옥 몰아넣어

'내면의 느낌' 따라 살도록 키워야
아이와 어른, 서로 친밀한 상호작용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의 인간성 진정으로 신뢰해야

우리의 위대한 ‘옆집 아줌마’는 이렇게도 말한다. "먹고사는 것도 문제지만, 나중에 한 10년 쯤 지나고 나서 아이가 ‘왜 엄마는 나더러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닦달하지 않아서 내 인생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았느냐’고 원망하면 어떻게 할래?" 그렇다. 지금 당장이야 인성교육이니 혁신교육이니 대안교육이니 행복한 아이니 하면서 뭔가 좀 해보려고 하지만 문제는 5년 뒤, 10년 뒤, 20년 뒤가 아닐까? 대학 입시철이 다가오거나 아니면 시원찮은 학력으로 취업을 하고자 할 때, 과연 우리 아이와 나는 뒤늦게 발을 동동 구르진 않을까? 과연 이런 식으로 무작정 행복하게 키운다고 마냥 좋은 것일까, 나중에 진짜 후회하지나 않을까? 바로 이런 폭탄 같은 옆집 아줌마의 한 마디에 모든 게 또다시 허물어지고 만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에서도 다시금 차근차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열쇳 말은 ‘인생에 대한 자기책임성’이다. 물론, 이 말이 신자유주의 경쟁 시대의 논리처럼 "당신이 힘들게 사는 것은 결국 당신의 나태나 무능 탓이다. 결국 네 잘못이다."와 같은, 국가나 기업의 사회적 무책임성을 내포한 말은 아니다. 어차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모든 개인은 한 사회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일정한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또 만들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주체적 관점과 공동체적 관점을 동시에 전제한 위에서 ‘인생의 자기 책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자기 책임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요컨대, ‘어른 인생은 어른 것이고, 아이 인생은 아이 것’이란 말이다. 어른이 아이 인생을 대신 살아줘서도 안 되고, 아이가 어른이 못다 이룬 한을 풀기 위해, 어른이 대리만족을 느끼도록, 대신 살아줘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부모들이 세계적으로 높은 ‘교육열’을 보이는 것은 대개 이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어른들은 마치 자기가 수험생인 것처럼 아이의 공부나 성적을 위해 시간, 돈, 열정을 다 투입한다. 그렇게 헌신적인 부모를 보고 아이는 죄책감과 의무감을 느끼면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리하여 성적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막중한 부담을 떠안는다. 나아가 아이는 부모님이 소망하는 바(대개 부모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 - 일례로, 일류대학이나 좋은 학과, 각종 국가고시 합격 - 을 아이가 대신 이뤄주기를 바란다)를 실현해드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간의 부모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기 쉽다. 이런 식으로 부모와 자식 간에는 ‘암묵적 계약’이 성립한다. 이 암묵적 계약은 대단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실패해도 문제고 성공해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부모는 배신감을, 자식은 죄책감을 느낀다. 성공하면 부모는 일순간 기쁘지만 자식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괴롭다. 나중이라도 자기 길을 찾는 순간 부모는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래도 곤란하고 저래도 곤란한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이 인생은 아이대로, 어른 인생은 어른대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갈 수 있는가? 그것은 아이를 어릴 적부터 ‘그 내면의 느낌’에 따라 살도록 키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늘 아이와 어른이 친밀한 상호 작용을 하면서 같이 가야 한다. 그러니 아이 인생과 어른 인생은 ‘같이 가면서도 따로, 또 따로 가면서도 같이’ 가는 것이다. 사실, 어른조차 그렇게 커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노력하면 조금씩 바뀐다. 그래서 아이가 진로 선택을 하게 될 때도 어른들의 고정 관념에 따라 "이런 것이 앞으로 전망이 있을 것 같아."라고 먼저 말해선 안 된다. "너는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하고 싶으니?" 또는 "너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니?"라고 물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느끼는 바를 솔직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아직 잘 모르겠어요."가 대부분 아이들의 반응이다. (그럴 적에도 "그러니? 그러면 좀 시간을 갖고 천천히 찾아 보렴."하며 기다려주어야 한다. ‘진로탐색기간’을 1-2년 갖는 것도 좋은 일이다. 종종 남자들에겐 군대가 그런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자기 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우리가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자신의 내면이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길러오지 않아서다. (바로 이 부분이 인성교육이고 혁신교육이며 대안교육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어른들이 옳은 길을 제시하거나 명령하고 아이들은 순종하기만을 바래왔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인사말에서조차 "부모님 말씀 잘 듣고…"라 하는 것이 그 한 예다. 그렇게 순종적인 인간을 우리는 ‘착한 아이’라 불러왔다. 학교에서는 그것이 ‘모범생’으로 불렸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워놓고 이제 와서 "아니, 네 꿈이 뭔지도 모르냐? 바보 아니냐?"고 하는 것은 어른들의 무책임성, 사회의 무책임성만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작은 어른’이라 생각하며 존중하고 다소 기우뚱하더라도 대등한 입장에서("기우뚱한 균형")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자신이 진실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진로문제나 취업문제도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부모는 아이 인생의 동반자 내지 후원자 정도로만 머물면 된다. 부모가 아이 인생에 대해 명령자로 군림하거나 통제자가 되어 일일이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서로 인생이 고달파지고 스트레스만 충만하게 된다. 오늘날 아이들이 엄마를 "미친 년"이라 표현하고 ‘안티 엄마 카페’까지 만들며 아빠를 "돈 버는 것밖에 모르는 찌질이"라 표현하는 것, 일 년에 250명 내지 300명의 10대 청소년이 자살하는 것도 모두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최초의 대안학교인 <서머힐 학교>를 세운 A. S. 닐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교사로 분류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 나는 스스로를, 진정으로 인간성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렇다. 부모도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아이의 소유주가 되어선 안 된다. 노동자가 기업주의 소유물이 아니듯이,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도 자기 삶의 주체, 즉 인격체여야 한다. 그래서 부모도 아이의 인간성을 진정으로 신뢰해야 한다. 아니, 자녀의 인간성을 진정으로 신뢰하지 않는 이는 부모의 자격이 없다고 해야 옳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한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것이다!" 그래야,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지만, 바로 이것이 참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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