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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만들기가 인생에서 가장 기억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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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만들기가 인생에서 가장 기억 남아
  • 이성원(연기새마을금고 이사장)
  • 승인 2012.07.11 1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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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곳을 찾아서 50년... ⑪

한평생 청소년선도와 사회계몽 운동을 해온 이가 있다. 꼬박 50년간이다. 연기새마을금고 이성원 이사장은 1960년부터 지금까지 청소년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구현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있다. 이 이사장이 청소년선도와 사회계몽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1960년 조치원역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버려진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고, 호적도 없어 학교마저 들어갈 수 없는 ‘무호적자’를 위해 ‘호적갖기국민청원’을 하기도 했다. <세종포스트>는 이성원 이사장의 청소년선도, 사회계몽 운동을 중심으로 연재를 한다. ‘시민참여 일간지’인 <세종포스트>는 이처럼 세종시민이 참여해 만드는 신문이다. <편집자 말>

▲ 호적 찾아주기 국민청원으로 호적을 갖게 돼 군에 입대한 사람들. 앞줄 맨왼쪽이 필자

무호적자에 호적을 만들어 달라는 '국민청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당시 호적 주무 부서인 내무부에도 탄원서를 올려다. 하지만 내무부에서는 호적을 만드는 부서는 법무부 소관이라며 법무부로 이관했다. 참 난감했다. 개인자격으로, 아니 조치원 희망원 원장 자격으로 내무부 등 관계기관에 호적찾아주기 운동을 역설해도 도무지 움직여주질 않았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어서 직접 국민청원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타이핑을 해서 일일이 관련부처를 찾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 민족보위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토벌된 사건이 터졌다.


때는 1968년 1월21일이었다. 김신조 일당이 서울까지 침투한 사건은 국내는 물론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단 한 차례의 불심검문조차 받질 않고 유유히 소총을 메고 내려오자, 정부는 혼비백산해서 여러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가 호적 만들기 절호의 기회였다. 내무부는 전국에 호적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전수조사를 했다. 12만명이 무호적자로 조사됐다. 8만명이 실질적인 무호적자이고 나머지 4만명은 군입대 기피자, 범죄인, 피난민 등이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 다급해진 건 정부였다. 우선 각 시도에서 발행하던 '도민증'을 전국으로 통일하는 주민등록증으로 바꿔 전국민이 신분증을 갖게 됐다.

이때 주민등록증을 만들면서 호적도 자연스레 만들었다. 희망원 걸인들도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격을 갖게됐다. 필자는 평생에 호적찾아주기 국민청원운동을 가장 감명 깊고 기억에 남는 일이다.

정부가 나서서 주민등록법을 제정하고 호적을 정리하면서 무호적자 12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호적을 갖게 돼 군대도 가고, 학교에 입학했다. 또 성인이돼서 결혼하는 사람들은 호적에 본인들의 이름과 주소 등을 넣으니,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증명을 받게 된 셈이다.

호적 찾아주기 운동으로 희망원 원생 뿐만 아니라 조치원 주민과 전국적으로 무호적자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신분증을 갖게 됐다.

사실 필자는 호적 찾아주기 국민청원 운동을 펼쳐 막상 정부가 나서서 호적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도 놀랐다. 물론 언론과 국민들이 호응해서 이뤄낸 것이다.

호적을 갖게 된 희망원 원생들은 나이가 많아도 군에 입대하고, 학교도 입학했다. 또 원생들 중에는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기도 했다. 종이 한 장에 표기한 호적등본 한 장이 이렇게 큰 힘일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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