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샌더스와 트럼프, 혹은 포퓰리즘의 귀환?
상태바
샌더스와 트럼프, 혹은 포퓰리즘의 귀환?
  • 박권일
  • 승인 2016.03.14 19: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수의견 | 대중의 정치 참여



민주당 경선을 넘어 미국 전역을 흔들고 있는 샌더스 돌풍은 오랜 미국 정치 속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사건이다. 사건. 그렇다. 이미 샌더스 신드롬은 때가 되면 돌아오는 정치행사를 넘어 역사적인 사건이 됐다. 현실적으로 샌더스가 클린턴을 꺾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는 것이 상당히 어렵긴 하지만(흑인 유권자의 지지율에서 여전히 압도적 열세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누구도 샌더스가 이처럼 선전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버니 샌더스의 이력은 기존 민주당 주류 정치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20대와 30대를 ‘운동권’으로 살다 마흔에 인구 4만 명 남짓 되는 벌링턴의 시장으로 당선됐다. 이후 30년 이상 같은 지역에서 시장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해오다가 70대 중반이 돼서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 20대부터 지금까지 샌더스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한다.


미국 주류 언론들은 시골 상원의원 출신의 이 좌파 정치가를 철저히 무시했다. 이미 힐러리 클린턴을 턱 밑까지 추격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그동안 버니 샌더스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내부에서 겨우 나왔을 정도다. 주류 언론이 샌더스 현상을 무시한 이유는 샌더스가 소위 파워 엘리트에 속하지 않고 전국적 조직기반이 없는 비주류 정치인이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민주당내 좌파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샌더스의 이념도 영향을 끼쳤다. 즉, 주류-기득권에 기운 관성적 보도습성에 더해서 여전히 미국에 남아 있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까지 작동했던 것이다.


이번 미 대선의 정당 경선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무대는 공화당 경선이고, 주인공은 도널드 트럼프다. 네오콘조차 공개적으로 반대할 정도의 극우인종주의 성향을 드러내 온 그는 온갖 저열한 비속어와 욕설을 공개적인 토론장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막말정치’의 새 장을 열었다.


공화당 선거판은 트럼프에 의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그는 토론장에서 관중을 선동해 테드 크루즈 후보에게 여성 성기를 가리키는 말(pussy)로 야유하도록 유도했고, 마르코 루비오 후보를 ‘꼬마’라고 조롱했다. 루비오가 발끈해서 ‘트럼프는 손이 작고 손 작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받아치자, 트럼프는 ‘난 손이 작지 않고 신체의 다른 부위에도 문제가 없다’고 성기 사이즈를 암시하는 말을 해 TV를 시청하던 미국의 수많은 학부모들을 경악시켰다.


트럼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미국인 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하지만 단지 ‘유명인사’였다. 이 ‘백만장자 출신의 떠버리’를 진지한 의미에서 정치적 리더로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 트럼프가 ‘슈퍼 화요일’ 동안 7개주를 석권하는 대승을 거두면서 공화당 내 최유력 대선주자로 올라섰다. ‘막장 행보’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지지율은 나날이 고공행진 중이다. 심지어 리버럴 성향의 유권자가 많기로 유명한 메사추세츠주에서조차 트럼프는 49% 득표율로 압승을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러다 정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어떡하느냐”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민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문의가 폭주한다는 뉴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다. 샌더스는 좌파이자 풀뿌리 정치인이다. 격조 있고 명징한 언어로 유권자와 대화하고 정적과 논쟁한다. 샌더스는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공화당측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시기, “그놈의 이메일은 그만 말하고 정책에 관해 논의하자”고 말하며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인에게 ‘정치인의 품격’을 보여준 적이 있다.


반면 트럼프는 품격이나 격조는커녕 시정잡배만도 못한 언어로 공론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인종 혐오와 여성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백인우월주의단체 KKK(쿠 클럭스 클랜)의 전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지지를 선언할 정도로 트럼프는 명실상부한 극우파에 인종차별주의자다. 이렇듯 둘은 그야말로 ‘극과 극’의 정치인이다.


하지만 ‘정치현상’으로서는 중대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비주류의 반란’이라는 점이다. 샌더스 돌풍과 트럼프 돌풍은 민주공화 양당의 엘리트가 이끌어온 낡은 정치에 대한 기층 시민의 거부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걸 시사한다. 그렇기에 조직기반이 일천함에도 이토록 큰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샌더스의 ‘바람’을 추동하는 감정이 ‘분개와 환멸’이라면, 트럼프의 ‘바람’을 추동하는 건 ‘공포와 혐오’다. 지지 세력의 특성에 대해서는 따로 면밀한 분석이 있어야 하겠지만 중요한 점은 이 현상이 미국의 달라진 현실에 직면한 대중의 리액션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이것은 포퓰리즘이 귀환하는 두 가지 양태다. 전문가 중심의 대의정치에 매몰된 이들은 포퓰리즘을 경멸하고 비난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사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중핵에 닿아 있는, 그래서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정치의 ‘가능 조건’이다. 그것이 어떤 정치로 변화하는가는 결국 해당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민의 인식과 실천에 달려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