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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에 반기 든 '청개구리' 시인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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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에 반기 든 '청개구리' 시인 김영남
  • 한지혜
  • 승인 2016.03.0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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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쓰고 손수 요리도...세종시에 '해피공군' 오픈


‘결핍’으로 채워진 유년시절
시작(詩作)의 동력은 ‘외로움’
‘요리’로 시작한 균형 잡힌 삶




정동진역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정동진역」)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차역이 있다.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한 ‘정동진역’이다. 석탄 수송을 담당했던 시골의 조그마한 역이 유명해진 건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되고부터다. 이후 해돋이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정동진은 전국 최고의 해돋이 명소가 됐다.


당시 동명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시인이 있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영남(59) 시인. 2년 전 그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세종시로 터전을 옮겼다.


고정관념과 싸워 온 ‘청개구리’ 시인


“주류(시인들)의 반대편에서 평생을 고정관념과 싸워 왔다”는 김영남 시인. 그는 어렵고 난해했던 시 세계에 반향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뒤 소설보다 재밌는 ‘시’를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첫 시집이 『정동진역』이다. 위트와 기발함이 돋보인다는 평과 함께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제주도를 소재로 쓴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도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여행시의 일반적 형태에서 벗어나 향기롭고 은유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세 번째 시집은 고(故) 이청준 소설가, 김선도 화백과 함께 한 『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김영남은 시를, 이청준 작가는 산문을, 한국화를 전공한 김선도 화백은 그림을 그렸다.


김영남 시인이 고향에 애착을 갖기 시작한 건 같은 동네 출신인 이청준 선생 때문이다. 「눈길」, 「서편제」 등 고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 이청준 작가는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타지를 예찬해 온 그의 눈길을 고향으로 옮기는데 많은 영향을 줬다.


실제 그의 고향 마을은 산과 산이 마주보고 있는 첩첩산중이다.


“산 너머 저 아득한 곳 하얀 두 줄을/멧비둘기 날아간 긴 여운으로 문질러/이 세상에 없는 그리운 음악 듣겠네”(「가을 하늘에 해금이 있다」)라는 구절에는 고향 산골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 있다.


“어릴 적 고향은 바닷가 너머의 산중이었습니다. 집은 산과 산 사이에 위치했고, 시야는 하늘과 산 그리고 그 산들을 에워싼 안개뿐이었죠. 고향을 별 볼일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기인해요. 협소하고 답답한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동네에서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하고 돌아다녔어요.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동네에 모든 새집들을 내려놓고, 몰래 알을 구워먹기도 했지요. 전쟁놀이랍시고 땅벌 집을 습격한 날이면 친구들이 벌에 쏘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악동기질이 다분했죠.”


‘결핍’, 모든 문학인들의 원동력


그는 6남매를 둔 집안에서 유일한 말썽꾸러기였다. 동네에서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통에 혼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와는 그 정도가 심해 작고할 때까지 부자간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6남매 중 유일한 반체제(?) 인물이라고 했다. 집안에서 미움 받고, 사랑받지 못했던 유년기는 그에게 ‘결핍’으로 남았다.


이 때문에 생긴 정서불안과 조급증은 늦은 나이까지 이불에 소변을 누는 행위로 나타났다. 1, 2등을 도맡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던 아이는 잠결에 자주 실수를 했다. 동네 어른들은 아이들이 오줌을 싸면 “너는 영남이 닮아 공부는 잘 하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유년기의 기억 때문인지 그는 예나 지금이나 푸근한 사람을 좋아한다. 특히 ‘누나’에 대한 사무침이 크다.
“지금 서귀포의 전망 좋은 찻집에 앉아서/그런 누날 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니,/서귀포의 골목, 돌담, 오렌지밭이 내게/그런 누나가 한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누나가 얼마나 아름답고 포근한 섬인지도” (「서귀포는 진이누나를 생각나게 한다」). 제주도의 귤 밭을 바라보며 늘 바라던 ‘누나’를 연상하며 쓴 시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결국 그런 결핍이 내게 펜을 쥐어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결핍이 있어요. 가족, 집안, 사랑 등 결핍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이 결핍이 시 창작의 동력으로 발현되는 것이죠. 제게도 결핍이 있어요. 사랑받지 못하고 따돌림 받고, 미움 받았던 그런 결핍이 시인 김영남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외로움’, 시인에게는 큰 축복


흑석동 중앙대 앞에서 40년을 살았다. 모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 같은 사이는 좋으나 상대적으로 개인 생활이 부족했다. 문학인으로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다행이 세종에서는 “눈치 안 보고 산다”며 웃었다.


글 쓰는 사람에겐 무엇보다 혼자만의 ‘사색’이 필수적이다. 어떤 이들은 못 견딘다고도 하는데, 문인한테는 오히려 외로움이 큰 선물이다. 그는 “가끔 서울에 올라갈 때면 얼른 내려와 버린다”고 했다. 외로움과 마주할 수 있고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오고 싶어서다.


그런데 가끔 시인도 정말 외로울 때가 있다. ‘문학’을 이야기할 동인들이 없을 때다. 그래서 그는 올해부터 대전·세종 문인들과 교류에 나서기로 했다.


“꾸준히 신춘문예 예심에 참여해 왔어요. 지난해에는 직접 사사받은 제자 4명이 당선되는 영예도 얻었죠. 제자들이 모두 신춘문예로 졸업한 만큼 올해부터는 대전·세종에서 재능기부를 통해 창작 강좌를 해 볼 예정이에요. 또 이를 통해 문학을 향유할 수 있는 민간 문학서클 활성화에도 기여해 볼 생각입니다.”


그는 특히 어린 친구들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는 “감각이 죽기 전에 젊은 친구들을 가르쳐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스승으로서는 큰 보람”이라며 지도자로서의 꿈도 내비쳤다. 등단 이후 사라지는 작가가 아닌, 전문적인 젊은 작가를 키우는 것이 그의 또 다른 목표다.


그는 한동안 미뤘던 창작활동도 활발히 할 생각이다. 시는 물론 원래 산문을 쓰고자 문장공부를 시작한 만큼 오랜 시간 구상해 온 이야기를 글로 풀어낼 계획이다. 작품 주제는 시인의 드라마틱한 집안 이야기다.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어릴 적부터 생각해온 소재죠. 대학 현상문예에 수필로 첫 당선이 됐지만 정교하고 단단한 문장을 위해 시조를, 한계에 부딪혀서는 자유시를 썼었죠. 이제는 처음 꿈꿨던 산문을 시작해보려고 해요.”


‘균형’잡힌 삶, 그래서 선택한 ‘요리’


세상에는 시인을 향한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그 중 첫째가 ‘가난’이다. 시인은 궁핍하고 배고파야 한다는 것. 둘째는 천덕꾸러기 기질이다.


“균형잡힌 삶을 원합니다. 시도 잘 쓰고, 술도 잘 먹고, 또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 쓴다고 생계고 가족이고 팽개치는 건 사실 불행한 일이거든요.”


25년여 간의 직장생활. 일반적인 회사 정년은 50대 후반이지만 서른둘에 직장생활을 시작해 퇴직하고 나면 일한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은 그다. 그래서 남들보다 일찍 다시 세상에 나왔다. 제2의 삶, 시인이 요리를 한지는 벌써 9년째다.


“사실 전라도는 산간지역보다는 바닷가쪽이 음식 맛이 뛰어나요. 젓갈을 포함한 발효음식이 풍부해서 그렇습니다. 장흥 바닷가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맛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동네에서 솜씨 좋기로 유명했던 어머니의 손맛을 기억하고 있어요. 요리를 선택한 건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첫 가게는 서울에서 열었다. 이후 직장인들을 상대로 여의도에서도 가게를 운영했다. 세종행의 배경에는 새로운 도시라는 점도 있었지만 오로지 ‘맛’으로만 경쟁이 가능한 곳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꼼꼼한 사전답사를 거쳐 2014년 5월 상가가 준공되자마자 가장 먼저 가게를 오픈했다.


요리에서도 발현된 ‘거꾸로’ 심리


가게 운영은 꽤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건 ‘맛’이다. 특히 삼계탕 닭은 놓아먹이는 토종닭을 쓴다. 50일 된 숫병아리를 뜻하는 ‘옹추’는 1시간을 삶아도 진득하고 담백하다. 한강 이북 추운 곳에서 키우기 때문에 서울에서 직접 공수해 오고 있다.


찜닭의 경우는 주문 즉시 요리한다. 뽀얀 육수와 생닭 사용이 맛의 비결이다. 제일 맛있는 닭으로 한 가지 크기만 취급하기 때문에 대중소 할 것 없이 3~4인용 사이즈로만 제공한다.


반찬도 어머니가 해주셨던 전통 전라도식 그대로 재현했다. 열무김치, 겉절이, 깍두기, 연두부 등 꼭 필요한 반찬들만 상에 올린다. 그는 “특히 쉽게 접할 수 없는 열무김치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몇 접시씩 먹기도 한다”고 했다.


‘거꾸로 심리’는 이곳에서도 발동했다. 세종으로 이사 온 뒤 더 좋은 자재를 쓰면서 음식값을 내렸다. 서울에서 1만4000원이던 삼계탕가격이 세종에서는 1만2000원이다.


“이 집처럼 맛있고 저렴한 데가 없다며 다시 오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텃세가 없는 세종시는 맛으로만 경쟁이 가능한 승부처거든요. 다른 도시에서는 이미 자리 잡은 곳의 아성을 깨기 힘들뿐더러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죠.”


‘시’와 ‘요리’의 공통점


단어에도 무게가 있다. 가벼운 단어, 무거운 단어. 단어마다 가진 뉘앙스도 다르다. 시인들은 작품을 내놓기까지 수많은 ‘퇴고’ 과정을 거친다. 선택한 시어들로 만든 시구를 수없이 낭독하며 다듬는다. 시와 요리의 공통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처음엔 소금을 넣고, 다음엔 설탕을 넣어봤다가 실패하고 마늘을 넣거나
고춧가루를 넣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는 “이만큼 넣었다가 다시 요만큼 빼고, 이것을 빼고 저것을 넣어보는 실험과정은 ‘퇴고’라는 시작의 원리와 같다”고 했다.


“예민한 감각 없이 시도, 요리도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 요리를 하면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 스타셰프들이 대세 아닙니까. 시인 셰프군단은 어떨까요.” 시인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다시 30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주저없이 요리를 택하겠다고 했다. “시 쓰는 직장인이 아니라 요리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게 이유다. 적게 벌더라도 직접 내 몸으로, 내 손으로 만들면 보람의 크기가 다르다는 게 경험자인 그의 말이다.




해피한 삶, 남 눈치 보지 말기


‘해피공군’. 가게 이름처럼 시인은 늘 ‘해피’한 삶을 꿈꾼다. 낙천적인 그의 성격은 악동기질이 다분했던 어릴 적에도, 예순을 앞둔 지금도 그대로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든 요리든 늙어서도 가장 행복하려면 남 눈치 안보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누가 손가락질 하든,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삶을 향해 온 몸으로 뛰어들라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 장흥과 정동진, 제주도 모슬포항까지. 시인과 이야기한 곳들이 상상력이라는 기차를 타고 머릿속을 헤맸다.


특히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는 풍경. 그 쓸쓸하면서도 정다운 풍경 속으로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결핍 속에서도 시를 꽃피우고, 위트와 긍정으로 소통해 온 시인 김영남. 그의 말대로 이곳이 남은 생의 정착지라면 우리는 이제 ‘시와 산문’, 그리고 ‘맛’으로도 그를 만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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