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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부터 사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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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부터 사과해야 한다
  •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 승인 2016.01.11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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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협상 | ‘민족’ 아닌 ‘인류’ 입장서 바라봐야


피해자 동의 없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일본 ‘성노예’ 표현에 반감 내비친 이유는?
‘민족’이 아닌 ‘인류’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한일 양국이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군의 관여 하에 일어난 일이며 이런 관점에서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한다.”


한국이 재단을 설립하면 일본이 백 퍼센트 돈을 출연하기로 했다. 액수는 10억 엔이다.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최종적”“불가역적”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해결’이라는 것이고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이후의 상황은 다들 아는 대로다. ‘문제’가해결되기는커녕 확산하고 폭발하는 양상이다. 일단 일본 언론 반응은 한국에 비해선 차분한 편이었다. <아사히신문>은 편집위원 칼럼에서 ‘양국 지도자의 결단이 신시대의 막을 열었다’고 적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에서 “앞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주요 책임은 한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합의이행을 판단하는데 있어) 소녀상 철거가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한국 언론에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이 더 많다. 순전히 외교라는 차원에서 득실을 따져보더라도 이번 협상은 한국정부의 실패다. 냉정하게 봤을 때, 한국이 이번 협상을 통해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을 끌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좀 더 명확히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평가대로 “진일보”라고 할 만 했다.


문제는 이 “진일보”를 위한 출혈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가장 뼈아픈 부분은 한국 정부가 위안부(성노예)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향후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로 상호 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약속을 일본에 해준 것이다.


이건 두고두고 한국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기시다 외무상이 일본 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우리가 잃은 건 10억 엔 뿐”이라 자신 있게 말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진 않았지만 이번 협상에서 ‘위안부(comfort women)’ 표현에 대해 일본정부의 요구사항이 있었다.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소위 ‘위안부’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은 ‘강제성노예(enforced sex slaves)’다.


‘성노예’라는 용어는 1996년 유엔 보고서, 일명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이후 공식화됐다. 2012년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위안부가 아닌 성노예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재차 언급한적도 있다. 가해자인 일본 측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또 애초 그런 명칭으로 불렀다고 해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반면 ‘성노예’라는 용어는 국가와 군대가 식민지 여성을 감언·강압 등의 수단으로 동원해 성적 도구로 삼고 학대한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낸다. 성노예라는 표현에 대해 일본 정부가 히스테릭한 거부반응을 보여 온 것은 용어 자체가 그들의 법적 책임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성노예’ 표현을 쓰지 말라는 일본 정부의 요구에 대해 한국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유일한 공식 호칭”이라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도 사태의 일부다. 더 중요한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피해자의 자리’다. 이번 ‘합의’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미리 의견을 구하지 않았고 당사자가 결코 납득하지 못하는 협상 결과를 사후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러면서 “최종해결”을 말하고 있다.


이건 해결이 아니라 ‘2차 가해’다. 한국 정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껏 그렇게 행동해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방조해온 건 수많은 한국인들이다. ‘일본 놈들의 후안무치에 대한 활화산 같은 민족적 분노’ 이면에 있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차디찬 무관심이었다. 그 오랜 세월동안 할머니들은 반일정서를 자극하는 박제된 증언으로 도구화되어 왔던 게 아닐까.


이 사건은 일본 민족과 한국 민족 간의 갈등이 아니며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간의 ‘합의’로 일거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성노예 강제 동원은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유린한 전쟁범죄다. 하지만 이를 민족 문제로 접근할 때 한국 밖의 세계에 호소력을 가지기 어렵다.


보편적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민족이 아닌 인류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것은 피해자와 같은 국적,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묻혀 있던 진실을 위해 증언했던 피해자의 편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는 다시 인류에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할책임이 있다.


가장 참담한 일은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합의’하고 ‘규정’하고 ‘논평’하고 ‘개탄’하고 ‘조롱’할 뿐이다. 약자들의 ‘무식함’과 ‘생떼’를 지적하며 비웃는 자들은 많은데, 손 잡아주는 이는 너무 적다.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별 일도 아닌데 고개 숙여 사과를 잘만하면서 가장 약하고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이는 드물다. 그러니 우리부터 할머니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일본군 강제 성노예 사건을 민족 문제로만 환원해온 몰인식에 대해, 냄비처럼 들끓다 잊어버리는 무관심에 대해, 나에겐 아무 책임 없다고 여긴 무책임에 대해.


*박권일은 사회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 했고, <소수의견> <88만원 세대> <우파의 불만> 등의 책을 썼다. <한겨레>, <시사인>, <세종포스트> 등의 매체에 칼럼을 연재했거나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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