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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그가 말한 ‘개혁과 세계화’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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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그가 말한 ‘개혁과 세계화’의 본질
  •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 승인 2015.12.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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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 응답 없는 ‘1996’


얼마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민주화의 거목”이 서거했다느니, 온통 애도의 물결이었다. 유력 정치인 몇몇은 자신이야말로 “YS의 정치적 아들”임을 자처하며 볼썽사납게 싸우기까지 했다. 만약 이 모습을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이 봤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한국인들 대다수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대단히 훌륭한 정치지도 자가 죽었구나’ 하고 여기지 않았을까? 아무리 망자에게 모진 소리 하지 않는 것이 한국사회의 풍습이라고 하나,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죽자 환호성을 지르며 축제를 벌였던 영국인들 정도는 아니더라도 김영삼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인 수사와 애도 일색인 것은 사실 매우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김영삼 씨는 그냥 이웃집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공인이었다. 그것도 가장 영향력이 큰 공인 중 한 사람이었고 오랫동안 정계에서 활동하면서, 그리고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몇몇 긍정적인 업적과 더불어 크나큰 과오 역시 여러 번 저지른 문제적 인물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변화는 아직까지 한국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 김영삼의 죽음을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공인의 죽음을 계기로 그런 이야기들을 다채롭게 펼쳐내는 것, 그런 일이야말로 사회에 ‘공론(public opinion)’이 존재해야할 이유가 아닌가.


물론 언론들은 “공과”를 언급하긴 했다. 그러나 그저 관용표현으로 저 말을 동원했을 뿐이다. 정말로 “과(過)”, 즉 잘못한 일에 대해 제대로, 집요하게 톺아본 평가는 찾기 어려웠다. 극우파가 장악한 언론환경 탓이 크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도 그 원인이 있다.


한국인들은 공인의 잘못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너무 쉽게 용서한다. 외국인들은 공인을 향한 이런 흐리멍덩한 한국인의 모습에 종종 당황한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은 원래 정이 많고 모질지 못해서” 운운하지만, 가소로운 소리다. 한국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 온 것은 정이 많아서가 아니다.


 ‘공인에 대한 평가’와 ‘사인에 대한 태도’를 명철히 구별하지 못하거나, (모종의 이유에서) 구별하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전 독재자 전두환”의 호화로운 노년 생활을 집중조명하면서 한국인이 얼마나 관대한지를 꼬집은 적도 있었다.


이 작은 지면에서 YS의 공과를 전부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언론과 대중의 시선이 얼마나 편향적인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김영삼 정권 시절 대학에 입학해 다녔던 내 또래들에게, 특히 1996년의 거리에서 공권력과 맞서 싸웠던 이들에게 YS는 결코 추모와 애도의 대상일 수 없다.


노수석, 권희정, 진철원, 황혜인, 오영권 등 1996년 봄에만 다섯 명의 대학생 열사가 나왔다. 1996년의 죽음들이 김영삼 정권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만 지적한다면 그때의 상황을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막연한 비극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열사들의 직접적인 사인은 각각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모두 같았다. 김영삼 정권이다. 이른바 문민정부는 대학 신자유주의화로 등록금을 폭등시킨 주범이었고, 공안탄압의 기획자였으며, 과잉진압으로 인명을 앗아간 살인자였다.


1996년 대학생들이 집회에서 내건 구호는 크게 두 가지다. “대선자금 공개” 및 “살인적 등록금 인상 철회”. “대선자금 공개”는 노태우의 돈으로 선거를 치른 정권의 태생적 모순에 대한 항의였다. “등록금 인상 철회”는 해마다 두 자리 수 퍼센트 포인트로 올라가는 등록금에 대한 저항이었다. 2015년 오늘의 청년세대를 옭죄는 어마어마한 대학 등록금, 그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김영삼 정권의 작품이다.


교육예산을 늘리겠다는 대선 공약을 당선 직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김영삼은, 학과 체제를 해체해 학부제로 전환시키고, 대학종합평가제로 대학 간 무한경쟁을 본격적으로 부추기기 시작했다.


사립대학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등록금을 폭등시켰다. 재단전입금은 줄고, 교육의 질과 학생복지도 갈수록 열악해졌다. 대학은 학생과 학부모의 고혈을 짜낸 돈으로 덩치를 불려갔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김영삼은 대학이 교육기관에서 사기업으로 달려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대학의 기업화는 정권의 본질에서 파생한 필연적 결과다. 김영삼 정권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 규정이 적확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첫째, 한국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정권. 둘째,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국민경제를 파탄시킨 정권. 신자유주의는 쉽게 말해 공적 영역을 파괴하고 해체해 사익추구집단에게 안겨주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김영삼은 그것을 “개혁” 또는 “세계화”라 불렀다.


한국사회의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온 정권이 바로 김영삼 정권이다. 김영삼은 1994년 외환자유화 조치 이후 이 조치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금융기관 감독에 태만했고, 단기금융 위주의 위험천만한 금융 시스템을 제어해도 모자랄 판에 심지어 독려하고 확산시켰다. 특히 위기가 임박한 1997년 하반기에까지 부질없는 환율방어에 집착하다 결국 대다수 금융기관들이 채무불이행에 빠지게 만들었다.


금융자본주의의 속성에 무지했던 김영삼 정권이 도입한 신자유주의는 외환위기 이후에는 타율적으로 강제된다. 신자유주의는 한국사회 전체를 틀 짓는 최상위 규율이 되었고, 국민들에게도 각자도생의 철학으로 내면화되었다.


20년 전 김영삼의 “세계화”는 2015년 “헬 조선”이 됐다. 참으로 놀랍게도 “헬조선”을 한탄하는 한국인들은 그 지옥을 가져온 정치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둘 중 하나다. 철저한 망각이거나 혹은 집단 마조히즘(매저키즘)이거나.


*박권일은 사회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 했고, <소수의견> <88만원 세대> <우파의 불만> 등의 책을 썼다. <한겨레>, <시사인>, <세종포스트> 등의 매체에 칼럼을 연재했거나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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