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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잡고 걸으며 옛날이야기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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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잡고 걸으며 옛날이야기 한 구절
  • 이충건 기자
  • 승인 2014.05.0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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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산·전월산 둘레길 스토리텔링

지난해 7월 15일 총 연장 168㎞에 달하는 행복도시 둘레길 18코스 중 도시문화길 4·5코스와 원수산·전월산 구간이 조기 개통됐다. 도시문화길 4코스인 원수봉정상길 4.3㎞, 5코스인 전월산풍경길 2.4㎞, 그리고 원수산과 전월산을 잇는 내부순환 생태문화길 5.1㎞ 구간이다. 둘레길 코스 중 원수산을 출발해 전월산까지 횡단하는 코스는 약 8㎞로 3시간가량 소요되는데, 금강 백사장을 바라보며 걷는 풍광이 수려하다. 이 구간은 알고 걸으면 더 재미있는 길이다. 자녀의 손을 잡고 옛날이야기 한 구절씩 들려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용샘, 며느리바위, 상려암, 숭모각과 은행나무, 항서바위, 덕성서원(숭덕사) 등 역사와 전설이 깃든 곳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어서다. 원수산·전월산 둘레길의 스토리텔링을 정리했다. <편집자>

용샘·며느리바위·상려암·숭모각·항서바위·덕성서원…

수려한 풍광 속 역사와 전설 이야기보따리 한 아름

전월산(轉月山)은 옛 충남 연기군 남면 양화리의 뒷산으로 높이가 260m다. 산의 동쪽이 금강과 미호천의 합류부여서 강물이 삼태극의 현상으로 돈다. 달밤에 산 위에서 동쪽의 강을 내려다보면 강에 비친 달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데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월산 정상에 ‘용천(龍泉)’이 있는데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전월산 위에) 신기한 약효가 있는 샘이 있는데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곳이다. 줄기가 공주 무성산에서 뻗어 온다"고 기록돼 있다.

용의 승천 도운 곰보처녀

용샘

‘용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곳에 풀뿌리를 캐먹을 정도로 가난한 집이 있었다.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씨가 고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그 집에는 출가할 나이가 된 처녀가 있었는데, 워낙 빈곤한 살림이어서 시집보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굴에 딱지까지 나 흉한 모습이 됐다. 가난한 집 곰보 처녀를 누가 거들떠볼까. 처녀의 부모는 시름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날, 처녀는 샘으로 가 머리에 감았던 댕기를 풀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이상하게도 물이 차고 부드러웠다. 처녀는 다시 댕기를 매려다 화들짝 놀랐다. 샘물에 비친 얼굴이 감쪽같이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은 듯 처녀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때 댕기가 샘에 떨어졌다. 처녀가 댕기를 쥐려는 찰나 댕기가 물속으로 빨려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상한 일’이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갑자기 커다란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처녀가 빠뜨린 댕기가 물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있던 용의 가슴을 간지럽혀 용이 승천을 한 것이다. 그 후 처녀는 좋은 집으로 시집가 행복하게 살았고, 사람들은 이 샘을 ‘용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버드나무 된 이무기의 심술

용샘 근처에는 버드나무가 무성했었다고 한다. 이 버드나무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다.

용천은 산속으로 뚫려있어 금강까지 물이 흐른다고 한다. 고려초엽, 금강의 이무기가 물줄기를 타고 용천에 올라와 있었다. 옥황상제의 부름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넓은 강물에서 마음껏 헤엄치던 이무기가 좁은 용천에 올라와 있자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전월산이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벼락이 치더니 하늘 한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월산의 파수병은 들어라. 그대는 승천하면 천궁을 지키는 파수병이 될 것이다. 그러니 몸가짐을 깨끗이 하여 승천할 때는 티끌 하나 없이 맑아야 한다. 또한 승천할 때는 산모가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되니 이점을 명심하라."

다시 수십 년이 흘렀다.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이무기에게 승천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물줄기가 내려왔다. 이무기가 물줄기를 타고 승천을 하는데 하늘 중간쯤에서 물줄기가 멈춰 서는 게 아닌가. 하늘에서 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하에 바보 같은 놈아. 산모를 주의하라지 않았느냐. 건너 마을 반곡의 산모가 너를 쳐다보고 있지 않느냐."

충격에 휩싸이기도 전에 이무기는 다시 용천으로 떨어졌다. 산모 때문에 승천을 못한 이무기는 버드나무가 됐다. 버드나무가 된 이무기는 자라서 반곡마을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마치 그 마을을 원망하듯. 버드나무가 자라 반곡마을이 보이자 이번에는 반곡마을 아낙네들이 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승천이 좌절된 이무기의 심술 때문이었다.

이후 반곡마을 남자들은 밤이 되면 전월산에 올라 버드나무를 베었다. 반면 전월산 아래 양화리 사람들은 반곡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버드나무가 잘 자라야 마을에 재앙 없이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충신 임난수의 절의

상려암

용샘에서 원수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상려암(想麗岩)’ 혹은 ‘상여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도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임난수 장군이 전월산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고려에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산초와 풀뿌리로 연명하던 임난수는 아침에 일어나면 전월산을 한 바퀴 돌며 망한 고려를 생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월산을 돌다가 커다란 바위를 발견했다. 그 바위는 위가 평탄했지만 밑에는 천길 벼랑이라 앞이 확 트였다. 그는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며 망한 고려를 생각했다.

이윽고 세월이 흘러 그는 노환으로 바위 위에서 죽었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상려암’ 또는 ‘상여바위’라고 불렀다. 임난수의 고려에 대한 절개가 갸륵하지 않은가.

돌로 변한 착한 며느리

며느리바위

상려암을 지나 전월산 중턱에 또 다른 전설이 깃든 바위가 있다. 고인돌처럼 생긴 며느리바위다.

옛 연기군 남면 진의리에 큰 부자가 살았다. 부인과 아들이 죽어 며느리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승이 시주를 하러 왔다. 부자는 노승을 홀대하며 줄 것이 없으니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심지어는 선심을 베풀어 달라는 노승의 얼굴에 두엄을 끼얹기까지 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노승이 다시 그 집을 찾았다. 때마침 며느리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던 터라 노승은 후하게 대접을 받았다. 감격한 노승은 이 마을에 대홍수가 닥칠 것이니 재산에 미련을 두지 말고 산으로 올라가 피신하라고 일러줬다. 산에 올라가는 길에 누가 불러도 절대 돌아보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튿날 노승이 말한 대로 비바람이 치기 시작했다. 마을의 집들이 둥둥 떠내려갔고 대궐 같던 시댁도 마찬가지였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산으로 피신하자고 했지만, 시아버지는 재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며느리는 하는 수 없이 혼자 산 위로 뛰기 시작했다.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산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시아버지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며느리는 고개를 돌렸다. 후회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바위로 변했다. 며느리가 살던 마을은 호수가 되었다.

울음소리 내는 은행나무

숭모각

전월산 풍경길을 지나 양화1리 원수산 둘레길에 접어들면 숭모각(崇慕閣)이란 사당이 있고 그 앞에 수령 600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숭모각은 임난수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부조묘(不廟)다.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의 신주(神主)를 사당에 영구히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세운 곳을 말한다.

양화리 은행나무

은행나무 두 그루는 임난수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나무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두 그루의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어느 날 마음씨 나쁜 방물장수가 마을에 들어와 이곳에 말을 매어놓고 빈집마다 들어가 물건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물건을 가득 훔친 방물장수가 말에 물건을 싣고 있는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 말이 벼락을 맞아 죽고 나뭇가지 하나가 뚝 부러졌다.

그 후로 이 나무는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나 마을에 나쁜 일이 일어나면 울음소리를 내며 가지가 하나씩 부러져 내렸다. 일제강점기 왜인들이 나무를 베려하자 벼락이 쳤고, 한국전쟁 때도 나무가 윙윙 울었다고 한다.

800년 전 연기대첩의 현장

항서바위

원수산 둘레길에는 800년 전 연기대첩의 현장이 남아 있다. 항서(降誓)바위다.

몽골에 대한 40여년의 투쟁, 치욕적인 강화, 두 차례의 일본정벌로 국토와 백성이 초토화된 고려 충렬왕 때다. 원나라에서 쿠빌라이에 반대하는 반란이 발생했고, 패전한 반란군 일부가 고려를 침략했다. 합단을 수괴로 한 반란군은 동북지역 요충지인 등주, 화주를 점령한 후 철령을 넘어 교주도(강원도)를 침입하고 양근성(경기도 양평군)을 공격했다. 원주와 충주에서 민관이 힘을 합쳐 반란군을 격퇴하면서 전세가 반전됐고 때마침 원나라 원군도 참전했다.

그제 서야 고려 조정도 중익군에 인후, 좌익군에 한희유, 우익군에 김흔을 임명하고 공세를 펼쳤다. 인후는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를 호위해 고려에 온 몽골인으로, 원나라의 위세를 믿고 왕을 업신여기는 등 오만방자한 인물이었다. 적은 충주전투 패배 후 충청도로 진입해 지금의 세종시 정좌산 아래 진을 쳤다. 연합군은 어둠을 틈타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역사적인 연기대첩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격렬한 적의 저항에 맞서 김흔이 이끄는 우익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을 베어나갔다. 금강으로 도주하던 적들은 30여리에 시체를 남겼고 강에 빠져 죽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적은 전열을 가다듬고 금강을 건너 다시 침략을 시도했지만 원수산 인근에서 한희유가 이끄는 좌익군에게 괴멸됐다. 항서바위는 바로 한희유가 적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장소다. 연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1997년 세워진 연기대첩비가 세종시 연서면 고복저수지공원에 있다.

원수가 된 두 형제

원수산 정상 해발 250m를 오를 시간이다. 뾰족한 봉우리가 둘인 산이다. 이 봉우리를 형제봉이라 부른다. <향토지리지>에 따르면, 원수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원수산이란 이름을 잘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설 때문이다.

옛날 두 형제가 이 동네에 함께 살았다. 욕심 많은 형은 어떻게 하면 아우의 재산을 빼앗을까 궁리했다. 어느 날 형은 동생 식구가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은 하인에게 야음을 타 곡식과 물건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동생 집은 하인 둘이 지키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 두 하인은 술을 얼큰하게 마시고 잠에 떨어졌다. 그러자 복면을 한 서너 명의 그림자가 담을 넘고 들어와 광에 있는 곡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하인이 이 광경을 보고 소리를 지르니, 몇 명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와락 달려들어 하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날아온 몽둥이를 한 대 맞은 다른 하인은 재빠르게 담을 넘어 동생이 묵고 있는 주막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동생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인들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집은 불타 버리고 하인은 마당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형의 짓임을 짐작한 동생은 형네 집으로 몰려갔고 싸움이 시작됐다. 서로 찌르고, 때리고, 불 지르고를 한참 했을까. 동생의 하인이 형의 하인들을 모두 죽이고 만세를 부르자 난데없이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천둥번개가 쳤다. 갑자기 지각변동이 일어나 땅이 솟아나더니 두 개의 산봉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싸워 이긴 동생은 큰 봉우리, 형은 작은 봉우리라 하여 이곳을 원수형제봉이라 불렀다.

7현 배향한 사당, 덕성서원

덕성서원(숭덕사)

원수산 둘레길의 진입로 중 하나인 덕성서원(德星書院) 진입로. 덕성서원은 행복도시 예정지역 내 1-4생활권, 옛 방축리에 있다. 명현에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세운 사설기관으로, 오늘날 사립지방대학에 해당한다.

원래 명칭은 숭덕사(崇德祠)이며, 고종 22년인 1885년 임헌회 선생을 배향한 사우(祠宇,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로 창건됐다. 임헌회는 1881년(순조 11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1858년(철종 9년) 경영관이 됐고 이조참판과 대사헌 등을 지낸 뒤 이곳으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기호(畿湖) 유학의 거두로, 많은 학자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전우, 이재구, 김준영, 이유홍, 조흥순, 임헌찬 등 6명을 추가 배향하고 매년 음력 3월 8일 향사를 올린다.

이후 이곳에 사원을 세워 덕성서원이라 칭했으며, 7현을 배향한 사우는 숭덕사라고 했다. 2001년 연기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

정리=이충건 기자 yibido@sjpost.co.kr

*참고문헌 =‘금남면지’ ‘연기실록’ ‘연기군지’ ‘연기대첩연구’
도움말 = 행복도시건설청 문화도시기획팀 김교년 연구관·김은경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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