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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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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위기
  • 이충건 기자
  • 승인 2016.10.18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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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취할 것인가, 상생 할 것인가

 

대전은 ‘조선 드림’을 꿈꾸는 일본인들이 몰려와 형성한 근대도시다. 거기에는 철도 부설이란 ‘우연’이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 식민수탈과 대륙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경부선 철도 부설을 추진했다. 일제는 1892년부터 세 차례나 실측조사단을 은밀하게 파견했지만 대전은 경유지에 포함되지 못했다. 1903년 러일전쟁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제는 공기를 앞당기기 위해 직선로로 철도부설에 나서야 했다. 이 때문에 대전이 최종 결정지로 채택될 수 있었다.

 

한일병탄을 1년여 앞둔 1909년 대전이 호남선 철도 분기점으로 결정되면서 청부업자, 상인, 공사인부 등 일본 거류민들이 급속히 증가했다. 당시 대전의 일본인 수는 2487명에 이르렀다. 이 때 대전과 세종(조치원)의 첫 경쟁이 벌어졌다. 호남선 분기점 유치 경쟁. 물론 일본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대전의 승리였다.

 

기세가 오른 대전의 일본인들은 충남도청도 이전시켰다. 1923년 대전의 인구는 6728명, 공주는 8304명이었지만 일본인 수는 대전 4798명, 공주 1605명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철도로 성장한 대전의 첫 위기는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에서 비롯됐다. 잇따라 호남고속도로까지 뚫렸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면서 유통 중심지로서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후 대전은 대덕연구단지, 자운대, 정부대전청사 등 연구원, 군인, 공무원 등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소비도시로 거듭났다.


대전의 두 번째 위기는 2005년 찾아왔다. 호남고속철도 충청권 분기역이 진통 끝에 오송으로 결정된 사건이다. KTX오송역은 세종시의 배후역이다. 행복도시가 건설 중인 지금 상황을 빗대보자. ‘철도경쟁’에서 세종이 대전에 거둔 100년 만의 자존심 회복이다.

 

세종시 건설은 대전에 결정적인 위기가 될 것이다. 광역도로망이 시원해질수록 대전은 세종과 가까워진다. 세종시로의 인구이동도 한층 가속화될 것이다. 고속철의 한 축을 빼앗기고 광역도로로 세종과 연결된 대전의 미래. 당신은 어떤 생각인가. 세종은 대전을 탈취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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