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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모녀’는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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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모녀’는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 박권일 (시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4.07.22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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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 가난, 자살, 복지

박 대통령 물색없는 지적, 비난 자초

오랜 기간 진행 된 신자유주의 결과물

결국, 선거에서 표심으로 ‘신호’ 보내야

서울 송파구의 세 모녀가 생활고에 동반 자살한 사연이 뉴스로 알려지자 큰 사회적 반향이 일어났다. 이 가정은 60대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해 번 돈과 30대 작은 딸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큰 딸은 오랜 지병으로 거동조차 어려웠다. 그야말로 근근이 살아가던 가족의 일상은, 어머니가 팔을 다쳐 일을 쉬게 되자 급격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미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채가 쌓여있는 상태였다. 잠시 형편이 어려울지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만 있으면 대개 사람들은 이 악물고 그 시기를 견뎌낸다. 하지만 아마도 이 가족에겐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세 모녀는 연탄불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금 70만원과 편지를 남긴 채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겨 놓고.

모든 걸 놓고 가는 마당에 집세와 공과금이 무슨 대수였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9년간 인연을 이어오던 사람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신뢰와 염치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저토록 선량한 사람이 가난 때문에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잔혹한 현실에,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했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자조에서부터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라는 분노까지, 세 모녀의 죽음이 가져온 감정의 파고는 사뭇 높았다.

이 사건으로 서울시가 ‘사회안전망 부검’에 나선다는 기사가 떴다. 박근혜 대통령도 큰 관심을 보였다. 대통령이 ‘제도를 알았다면 지원받을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걸 두고 "저기 빵 있는데 왜 찾아먹지 못하냐는 소리"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박 대통령 발언이 물색없는 지적으로 보이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뒤이어 "있는 복지 제도도 국민이 몰라서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없는 제도나 마찬가지"라고 발언한 걸 봐서는 행정부 책임자로서 제도와 현장의 괴리에 대한 나름의 아쉬움을 토로한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선의로 이해해준다면 말이다.

세 모녀의 비극을 둘러싸고 여러 칼럼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현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 몇몇이 사태의 원인을 호도하는 경향도 보인다. 이들은 마치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들어서면서 이런 사건이 처음 나타난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부유층과 재벌에 유리한 국정을 펼쳐온 반면 서민들의 삶은 날로 팍팍해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자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들어 갑자기 새로 생겨나거나 엄청나게 급증한 현상이라 하기도 어렵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자살은 늘 있었다. 심지어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보이는 우리의 반응도 비슷비슷하다.

핵심은 이런 비극의 사회적 배경, 그리고 장기적인 추세다. 단지 특정 정권의 패악으로 환원해서 욕을 퍼붓고 끝낼 문제는 아니다. 크게 봐서는 오랜 기간 진행되어온 소위 신자유주의화의 결과물이다. 비정규노동의 양산으로 고용 안정성이 급격히 악화되었음에도 복지체계의 강화는 턱없이 못 미쳤다.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이미 OECD 최고수준이다. 자산불평등은 중간수준이지만 점점 악화되는 중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보통 높은 소득불평등은 낮은 자산불평등이 상쇄하고, 높은 자산불평등은 낮은 소득불평등이 상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변화를 보면 한국사회는 이런 형태가 아니라 소득불평등과 자산불평등이 동시에, 그것도 압도적으로 높은 단 하나의 예외인 미국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라마다 그 양상과 수치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의 역할이 그만큼 강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복지담당인력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린다하더라도 세 모녀처럼 기초수급자로 지정될 가능성이 희박했던 경우는 어쩔 수 없다. 그때그때 소득에 따라 차상위계층과 차차상위계층 등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복지사각지대에 놓이는 것을 막으려면 안전망을 더 촘촘히 하는 수밖에 없다.

진보진영 일각에서 떠오른 기본소득 논의 역시 기존의 정태적 복지정책이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과 밀접히 닿아있다. 복지라는 형식 속에서 결국 관건은 자산소득에 더 많은 세금을 어떻게 부과하느냐의 투쟁으로 귀결된다. 이번처럼 안타까운 사건이 줄어들기 바라는가? 그렇다면 재벌과 부유층의 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세력에 강력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신호는 투표소에서 발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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