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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의 상처, 아직 아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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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의 상처, 아직 아물지 않았다
  • 김재중
  • 승인 2013.07.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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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중 기자의 뉴스리뷰 | 정전 60주년, 그리고 제노사이드
img_body1950년, 끔찍한 기억을 회고하고 있는 김영금 할머니
1950년, 끔찍한 기억을 회고하고 있는 김영금 할머니


올해로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됐다. 7월 27일은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정확히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뀔 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의미다. 이 오랜 기간 전쟁이 남긴 상처는 치유된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잊혀진 것일까. 여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있다.

10년 전 여름, 전라북도 전주에서 만난 김영금(당시 85세) 할머니. 노파에게 한국전쟁은 비극을 뛰어 넘는 ‘한(恨)’ 그 자체였다. 해방직후 전라남도 완도 신지면에 살았던 할머니의 남편 이기동(1950년 사망추정)씨는 동경상고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남로당 관계자가 그가 교사로 근무하던 초등학교에 정치연설을 위해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 학교 교장은 이 교사에게 손님을 접대하도록 권유했다. 이후 좌익이 불법화되자 이 교사는 ‘손님 접대’에 대한 대가로 20년형을 언도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10월의 일이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지만 법률체계가 허술했던 당시로서는 이런 일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그 양반 빼낼라구 시골에서 논 두마지기를 팔아서 그때 돈으루 7만원인가 8만원인가를 챙겨가지구 전주로 올라왔당께요."

김영금 할머니는 전 재산과 다름없는 이 돈을 형무소 소장과 부장들에게 건넸다. 당시에는 돈을 건네고 출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남편이 출옥할 것으로 믿고 완도로 내려가 모내기를 마친 김 할머니는 뜻밖에도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비극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부랴부랴 전주로 다시 향했다.

"형무소 정문에서 본께, 군인들이 트럭에다 죄수들을 싣고 쩌어기 공동묘지 너머로 가더랑게요. 그리구 쬐끔 있다가 ‘우당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올라오더랑게요."

할머니는 비극을 직감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난 뒤, 그 다음 날의 일이었다.
"구덩이에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는디…."

할머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주름진 눈가엔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휴, 사람을 그 모양으로 맹그러 놓았는디, 흙은 덮다가 말구 기름을 찌그려 불을 꼬실렀는지 눈 뜨고는 못 보겠더랑게요. 며칠 지난 시체도 있는지 발싸 구데기가 꼬이기 시작했드라구요."

2003년 4월,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전주형무소, 학살의 전말

1950년 6월 말부터 20여 일 동안 벌어진 전주형무소 정치범 학살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두 명의 유가족, 세 명의 교도관, 그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취재원 20여 명, 전주 시지와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 등의 관련 자료, 그리고 전쟁 당시 종군기자의 기록을 샅샅이 취재한 결과였다.

김영금 할머니가 경험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비극은 훨씬 더 잔인한 양상으로 펼쳐졌다. 한국전쟁 직전, 엉성한 국가체계 속에서 전주형무소 재소자 수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700명이 적정 수용 인원임에도 형무소는 그 세배에 가까운 1900여 명의 재소자로 가득 찼다. 이들 중 대다수는 공산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격동의 시대’에 잘못 태어났다는 죄 아닌 죄를 가진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서울이 인민군들에게 점령되던 1950년 6월 28일경부터 전주형무소에는 저승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저승사자는 다름 아닌 헌병대였다. 그들은 명단도 없이 일단 장기수부터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형무소장은 법무부 등 상급기관의 명을 받고 재소자들을 저승사자에게 넘겨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광란의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1600명 정치범 집단처형

학살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학살 장소로는 사람들의 눈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전주시 옛 공동묘지, 건지산, 황방산, 소리개재 등이 선택됐다. 학살 초기엔 헌병들도 말뚝을 세우고 재소자의 가슴에 표적을 붙이는 등 이른 바 ‘총살형’의 흉내라도 냈다. 그러나 인민군이 수원을 거쳐 남하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이들의 마음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엉성하게 파고 너댓 명씩 묶어 기관총을 쏘아대는가 하면, 헌병대 영창에 갇혀있던 군 재소자까지 죽음의 광란에 동참시켜 총을 쏘게 만든다.

손을 뒤로 묶여 트럭에 실린 뒤, 사지로 떠나던 재소자들은 억울한 죽음을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한 채 구덩이에 던져지고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불에 타들어 갔다. 인민군이 더욱 가까워지자 전주형무소 형무관들은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목포와 광주 등으로 후퇴하게 된다. 경제사범 180여명을 기차에 태우고 목포로 피난했던 형무관 60여 명은 그곳에서도 똑같은 죽음의 광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기도 했다.

2진으로 피난을 떠난 형무관들이 데리고 나온 경제사범들까지 합하면 전주형무소에서 살아남은 재소자는 3백여 명에 그쳤다. 피난 온 1진과 2진의 형무관들이 광주에서 합류했을 때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1천 6백여 명의 모든 정치범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학살 장소를 설명하고 있는 이순기 전 전주형무소 형무관
학살 장소를 설명하고 있는 이순기 전 전주형무소 형무관


사무친 원혼, 하늘을 보다

2003년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전주시 황방산 기슭.

인근 주민들에게 학살 터의 존재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흙으로 쌓아올린 폭 1m 길이 20m 정도의 긴 흙 두둑은 10개 가까이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유골이 묻힌 자리라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두둑을 걷어내고 호미로 조심스럽게 남은 흙을 긁어 낸 결과 학살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워있는 유골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알기론, 여기 묻힌 죄수들은 3년 이하의 단기범들이었당께.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었다구 봐야재."

어렵사리 입을 연 이순기(당시 78세) 전 형무관의 기막힌 증언이었다. 초법적 국가권력에 의한 살인, 그 것도 불과 1년형을 받은 정치범까지 처형됐다는 사실. 이 땅에 이 만큼 크게 사무친 원혼이 떠도는 곳도 없을 터였다. 53년 만에 하늘을 바라본 원혼들은 그날 일부 유족들에 의해 항아리에 고이 모셔져 다시 어둠의 세계로 잠들어 버렸다. 이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돼 전주형무소 학살사건 등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가 이뤄졌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유해발굴과 유족에 대한 보상 문제는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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