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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 마을 문화재를 지켜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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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 마을 문화재를 지켜왔나?
  • 김교년(행복도시건설청 학예연구관)
  • 승인 2013.07.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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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자산이야기 | (4)남이웅선생 유물

후손 남대현, 남산영당 천정에 68점 보관
전신초상화 등 진귀한 유물 행복청에 기증
농사짓다가도 낯선 차량 발견하면 뜀박질
유품 보며 문화보존 정신도 기억하길


신문지상이나 방송에서 개인 혹은 문중이 박물관에 문화재를 기증했다는 보도를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국가적 재난을 수도 없이 겪었고,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과연 가치 있는 역사기록물이 남아 있을까 싶은데도 말이다. 이 의문에 답이 될 만한 사례가 우리도시에 있었다.

지금 반포면에 가면 남산영당이 있다. ‘영당’은 영정을 모셔둔 사당이란 뜻으로, 이곳은 의령남씨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인 문정공 남이웅선생의 사당이다. 조선이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끝내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삼전도치욕을 당한 후 소현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이 때 세자를 호종한 인물이 남이웅이었으며, 좌의정까지 올랐던 그의 묘소 역시 영당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다.

남이웅선생 초상

2006년 겨울, 도시전역을 대상으로 문화재현황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뜻밖에 선생의 유물을 후손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유물은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전문가들의 조사를 받았고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박물관에 소장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놀라움이 더욱 컸다. 유물수량만 해도 68점에 이르며 남이웅선생 전신초상화 2점과 초상초본 2점, 진무공신교서, 사패 및 고신교지, 불윤비답, 한글서신, 도장 등 하나같이 진귀한 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유물들이 개인이 관리하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그동안 어디에 어떻게 보관하고 있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후손 남대현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영당이었다. 내부는 깨끗이 정리된 상태였고, 유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손은 의자하나를 영당의 가운데에 놓고 올라서서는 영당의 천정 판자 한 조각을 밀어 올리더니 뽀얗게 먼지 쌓인 유물을 하나하나 내려 우리 앞에 놓았다. 정말 드라마 같은 장면이었다.

그제 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떻게 보존돼 왔는지 말이다. 조상의 유품을 조상대하 듯했던 후손들로서는 문화재라면 모두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유품을 보호하기 위해 더 깊숙이 더 은밀한 장소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남이웅선생 인장

후손은 그동안 남이웅선생의 유품을 보관하면서 겪은 말 못할 사정을 들려주었다. 부인과 같이 농사를 일구며 살아온 농부였던 그는 항상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유품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후손이 감당해야 할 책무 역시 무겁고 힘겨운 일이었다고 한다.

영당으로 가는 방법은 뒷산을 넘어와도 되지만 진입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농사일이 아무리 바빠 정신이 없다 해도 수시로 영당을 바라보다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이나 차량이 영당 근처로 다가가면 일손을 놓고 달려갔다고 한다. 혹시나 흑심을 품은 자로 인해 유품을 잃을까 싶은 마음에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마을을 떠나 멀리 다녀오는 일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집안이 대를 이어 그렇게 몇 백 년 동안 선생의 유품을 지켜왔을 것이다.

남산영당 전경
남산영당 전경


가끔 우리나라의 모든 중요한 문화유산을 국가가 한 곳에서 집중 관리한다면 안전하지 않았을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이나 화재가 일어나면 오히려 한꺼번에 멸실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관련 자료를 수집해 보관했지만 몽골침입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자료들이 목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불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기에 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이 남이웅선생의 후손들 같은 민초들이 각기 처한 환경에 맞춰 보호해 왔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이웅선생의 유품을 보고 있노라면 유물보다 이들을 지켜온 사람들이 떠오른다. 전쟁 때는 밤잠을 설쳐가며 유품을 가슴에 품고 지켰을 테고, 가세가 기울었을 때 식솔들을 위해 유품을 팔고 싶은 욕구가 왜 없었겠는가. 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고귀한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수많은 후손들에게 마음 깊이 찬사를 보내고 싶다. 지금은 이들 유물이 행복청에 기탁돼 국립공주박물관이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행복도시에 박물관이 건립되면 남이웅선생의 혼이 담긴 유품이 전시될 것이다. 그 때 많은 분들이 오셔서 유물만이 아니라 문화보존의 정신도 아울러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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