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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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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미학
  • 김용수
  • 승인 2012.09.12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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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내가 배운 것들에 대한 회의가 왔다. 서양 시스템으로 짜인 교육, 길들여지는 정서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오천년 역사를 가졌다는 민족이, 삼백년 역사에 눌려있는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 선조들은 과연 바보였는가? 내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가? 수많은 상념이 찰나에 일어난 것이다. 극에 달하면 반전이 있는 법(물극필반物極必反). 그리고 회귀. 내 고향 충청도 계룡산! 수많은 전설이 어린 그 곳에 나는 짐을 풀었다. 정체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허상의 인생을 살 것 같은 절박감이 있었다. 실패해도 좋았다. 적지 않은 세월이 갔으나. 나는 아직도 길속에 있다. 여기 글들은 그에 대한 기록이다. - 작가 김용수

세상천지가 모두 베풀고 있습니다. 해와 땅이 그러하고, 물과 공기가 그러하고 나무, 들꽃, 이름 모를 풀들 또한 그러합니다. 심지어 동물까지도 피와 살을 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베품 속에 둘러 쌓여있고, 그 베품을 기대 살고 있습니다. 만물이 다 내주고 있는 데. 오직!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이 곧 하늘입니다. 나눔이 곧 도道입니다. 큰 진리가 하나같이 자비와 사랑을 말하는 것은, 우주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 그러함이 길(道)이자 순리입니다. 성인이라 해서 외계에서 따로 온 것이 아니라, 다 시공時空 속의 일을 꿰뚫은 것입니다.

"콩 한 쪽도 나누면 보배다." 참 많이 듣던 얘기입니다. 간결한 말이나, 교훈은 큽니다.
콩에는 결이 있어, -태극기 음양처럼- 쪼개면 좌, 우가 똑 같이 쫙~ 나뉩니다. 이 콩을 나눌 때. 비록 내 손에 있으나 - 내가 더 같고, 상대를 덜 주는 것이 아니라. 평정과 평등심으로 차별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는 순간. 이미 그 콩은 콩이 아니게 됩니다. 콩은 사라지고, 사랑만 남게 됩니다. 작은 것은 점점 커지고. 저것과 이것을 가르던 이분법은, 태허같이 텅 빈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좌우가 균형 있게 나뉘는 콩에서 태극의 이치를 발견하고, 콩을 빗대어 인생을 얘기하는 선조들의 지혜입니다. 실제, 콩의 싹도 좌우 갈라진 틈에서 나오고, 다른 작물에 비해서 떡잎도 일찍 틉니다. 틈새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눔도 마음에 빈자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생명은, 틈이 없으면 생성도 없습니다. 여기에 허수의 참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양극화라든가, 나눔이란 말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선거철답게, 특히 정치권에서 요동 치고, 여기저기 야단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퍽퍽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원래 나눔과 베품은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지는 미덕이 있습니다. 인위가 덧씌워질 때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공여자나 받는 사람 모두 상처로 얼룩지기 십상입니다.
나눔은 자기 소양과 재능을 순결로서 주고받는 것입니다. 주는 자나 받는 사람, 그리고 공여 물, 이 셋은 하나같이 맑고 깨끗해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무심無心이라했고, 유가는 무사無私로, 노자는 무욕無欲이라 했습니다. 무심은 텅 빈 맘이요, 무사는 사특함이 없는 것이며, 무욕은 억지 없는 천연의 마음입니다.

옛 님들의 덕망 높은 집 대문간에는, 곡식이 가득한 큰 뒤주가 사계절 놓여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거나 끼니가 떨어지면, 마을 당사자는 새벽 녘 어스름을 딛고. 그 집 마당을 쓸거나, 외양간을 치거나, 땔나무를 들이거나... 그 흔적을 남기고 그 뒤주에서 분수껏 양식을 구해갔습니다. 별빛이 초롱초롱한 새벽녘이지만, 주고받는 양심은 순결했습니다. 결코 천상의 일이 아닌, 이 땅의 일인 것입니다. 참 멋있는 정경이 아닐 수 없고, 참 차원 높은 나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조들은 오늘날 의미의 보편적 사랑을 몰랐어도, 나눔을 홍익인간의 큰 줄기로 알았습니다. 노동을 나눈 것이 ‘두레’요, 생활을 나눈 것이 ‘계’契 요, 화합과 삶의 노고를 나누는 것이 ‘대동제’大同際입니다. 굳이 고원한형이상학적 개념을 빌지 않아도, 삶이 그대로 나눔이었던 것입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患難相恤), 동정어린 마음(惻隱之心)은 체화된 겨레의 천성이었습니다. 우리 고어古語, 사랑의 의미는. 사량思量한다, 괴다, 너기다(여기다) 등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상대에 대한 순수한 그리움과 배려요, 모자람도 따뜻이 감싸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정으로 대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이웃으로 퍼져 나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난망합니다. ‘부자가 되면 기운을 더 조악하게 쓴다(財大氣粗).’했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려하고, 강자는 더 강해지려 합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더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폭력의 제국’이, ‘보이지 않는 손의 제국’으로 옮긴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란 이름이 탐욕을 극대화하는 장場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탐욕은 오직 뇌를 가진 집단의 일입니다. 그 중에도 뇌가 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많이 갖고도 남의 것을 탐내고, 배고프지 않아도 빼앗으려 합니다. 인류 누 만년, 유전자에 각인된 투쟁 역사가 무의식중에 발동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나 사자는 배고플 때 외에는 포식자를 그냥 둡니다. 동물들의 사냥은 생리적 자연이나. 인간의 탐심은 조리調理에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의 이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일입니다. 부처는 탐욕(貪), 성냄(嗔), 어리석음(痴)을 독毒이라 했습니다. 생명을 해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치痴는 그냥 지식에 대한 우매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늘 변한다(無常).’하는 근본에 대한 무지無智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차면 비우고, 비면 채우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지진, 해일, 폭풍, 화산폭발은 스스로 정화하려는 천지의 몸부림입니다. 오늘날 재해가 빈번하고, 거세지는 것은 인간이 자초한 일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자기를 낳은 천지의 질서를 파괴하고, 오염시킨 결과입니다.
우리 몸도 넣기만 하고 비우지 않으면 탈이 생깁니다. 변비의 독은 대표적 상식이 되었습니다. 독毒은 욕망에 대한 저항이자 반항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부구조인 생식기나, 항문을 불결히 생각하고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체의 미세혈관이 제일 많이 분포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예민하다는 말입니다. 콩팥이나 방광, 항문이 제 구실을 못하는 순간, 독소는 쌓이고 전신 기능도 순조롭지 못하게 됩니다.

재화財貨가 상부 쪽으로만 이동하고 하부로 돌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인체로 치면 동맥경화가 걸린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동맥경화는 순환장애를 유발하는 것처럼, 제2, 제3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상부가 아무리 튼실해도 하부의 쇠약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간결한 논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지 못한 것은, 탐욕이 지혜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조의 문제도 있지만, 인간이 심리적 실재에 대한 이해와 반성 없이는, 고질병을 고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현대인은 햇볕, 흙, 노동을 잃어 버렸습니다. 볕과 흙을 등지니 나약해지고, 노동의 상실은 탐욕을 부축입니다. 먹을 거리를 스스로 생산해야했던 시기는, 사회 기풍 진작이 건전했습니다. 땀은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정직하게하고,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먹을거리와 재화의 분리는 상부와 하부간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화폐단위 숫자노름은 인간의 보루인 양선良善마져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횡령이 다반사로 생기고 있는 것은, 지식만 쌓고 수양을 놓친 결과입니다. 문명은 생명에 이반합니다. 편할수록 쇠약해질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집니다. 봉건시대 왕이나 귀족들이 단명했던 이유입니다. 인류진화과정은 이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탄생 후. 만물은 같은 근원에서 발생했고, 그 뿌리가 같다(萬物一切同根)는, 단순한 이 사실이. 고대의 모든 종교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평등사상은 그 중 하나입니다.
진리는 단순하나. 인간의 사유는 진화해온 세월만큼 복잡합니다. 번뇌는 또 번뇌를 낳습니다. 따라서 근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라! 이것이 진리의 외침입니다.

지구는 팔백만 종의 생물이 살아 있고, 알려진 것이 약 이백만 종입니다. 하나의 생명은, 까마득한 은하계로부터 바다 밑까지 상호 연결되어있다는 이 실상을 이해하면, 혼자만 살겠다는 탐욕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또렷이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에는 독립된 실체로서 완전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명은 여러 개체의 결합으로 탄생했으므로, 서로 기대고 돕는 일이 곧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세상은 같은 근원에서 생겼다는 - 이 근본을 자각할 때라야, 나눔은 자연이 됩니다.

올 때 그냥 왔으니(空手來), 갈 때도 홀가분히 떠나는 것입니다(空手去).
이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사실이자,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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