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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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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를 가다
  • 서경홍
  • 승인 2016.09.0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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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자전거 유럽여행 [5] | 서경홍 철학박사


다음의 목적지는 비텐베르크였다. 독일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이 작은 도시를 찾은 이유는 딱 한 가지 바로 마르틴 루터 때문이었다. 독일서 살던 나의 집 주소가 마르틴 루터 슈트라세 3번지였음은 이곳을 찾게 한 우연이었을까.

베를린을 떠나 비텐베르크까지 가는 길은 평지였지만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자전거로 혼자 달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지도상 90km가 조금 넘는 거리였는데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로 하루에 100여 km를 이동한다는 것은 무리다 싶었다.


6월 중순이었지만 북부 독일의 날씨는 제법 차가운 편이었다. 들판을 달려와 베를린 쪽으로 나를 밀어버리는 마파람은 자전거의 페달링을 더욱 무겁게 했다. 베를린 중앙역 근처의 숙소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나와 라디세우스는 트로이엔브리첸이란 곳에서 하루를 쉬고 그 다음날 점심때가 되어 비텐베르크 시청 앞에 도착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작센-안할트 주에 있는 이 도시는 비텐베르크 크라이스(우리로 치면 군 정도의 행정단위)의 중심지이다. 비텐베르크는 1938년부터 공식적으로 '루터의 도시'가 됐다. 16세기만 하더라도 이곳은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16세기 초에 엘베 강 중류에 있는 비텐베르크에 커다란 요새가 건설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2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502년 자신의 궁정에 대학을 설립했으며 이 대학은 교회가 아닌 영주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대학이었다.


이로 인하여 선제후의 궁정은 학문탐구의 중심이 됐다. 그 시기에 에어푸르트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신학으로 돌아선 루터가 이곳으로 온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스승 요한 슈피우츠의 뒤를 이어 교수로 임명됐다.


15-16세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이자 로마 가톨릭의 쇠퇴기였다. 십자군전쟁의 패배, 동서교회의 분할, 교황들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이미 교황권에 대한 반항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때였다.


이미 이탈리아에서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족벌주의와 탐욕에 반기를 들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보나롤라가 내란을 일으켰으며 북부에서는 얀 후스, 위클리프, 히에로니무스가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과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때였다.


그럴 즈음에 교황 레오 10세의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 충당과 막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의 사욕이 전대사를 조건으로 한 면죄부를 남발한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궁정교회에 정문에 '면죄부 능력 천명에 대한 반박'이란 제목으로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붙여 종교개혁을 촉발시킨다. 루터와 종교개혁이란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루터 개인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여기서 들추기엔 너무도 복잡한 일이다. 발길을 루터하우스로 돌렸다.



루터하우스 정원에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루터가 “프랑스와 베니스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다”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이다. 원래 수녀였던 그녀는 루터에 감명 받아 다른 수녀 8명과 함께 수녀원에서 탈출해 비텐베르크로 온다.


루터는 그 수녀들의 혼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마지막으로 카타리나만 남게 되었다. 본래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루터는 아버지의 권유와 카타리나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을 한다. 때는 농민전쟁이 한창이던 1525년이었다.



체구가 작은 카타리나는 매우 억척이었다. 대식구를 거느린 가난한 살림을 옹골지게 꾸려가며 루터를 내조했다. 루터가 그녀를 처음엔 도미나(안주인)로 부르다 도미누스(바깥양반)로 부른 것도, 카타리나를 캐테(이 말은 사슬이란 뜻의 동음이의어)로 부른 것도 그녀의 다부짐과 억척을 말해준다. 그러나 루터는 “여왕이라 할지라도 다른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루터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독일의 농민전쟁이다. 중세 말기부터 서서히 진행된 자본주의는 영주와 지주, 소작농의 대립을 가져왔고 자본가의 착취가 갈수록 심해졌다. 독일의 농민들은 토마스 뮌처의 영향을 받아 영주들의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과감히 맞섰던 루터가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루터는 농민전쟁이 윤리적, 도덕적, 합법적인 차원을 벗어난다하여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쓴 소설 『미하엘 콜하스』는 루터의 이러한 입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농민봉기를 일으켰던 주인공 미하엘 콜하스로 분한 배우 매즈 미켈슨이 루터가 읽어주는 판결문을 듣고 효수를 당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우즈 업된 그의 눈망울은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루터하우스로 들어갔다. 빨강머리 앤처럼 머리를 물들인 여직원이 어쩐지 루터의 종교개혁처럼 ‘개혁적’으로 보인다. 루터가 남겨 놓은 흔적들이 크지 않은 전시실에 보관돼 있었다. 루터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인 독일어번역 성경 구텐베르크판본도 있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피해 융커 외르크로 신분을 바꾸어 아이제나흐의 바르테부르크로 피신했는데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그리스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이것이 독일어의 대중화와 독일문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루터와 같은 시대에 비텐베크르의 궁정화가로 활약했던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임종 그림이 전시실의 출구 근처에 걸려있다.


주름진 하얀 수의에 흰 곱슬머리, 자는 듯 눈을 감은 살찐 얼굴. 거친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너무 편하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다.



전시실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빨강머리 앤이 막 근무교대를 하고 퇴근 중이었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하니 선뜻 나서준다. 루터하우스 마당에는 아직도 그의 부인 캐테가 힘차게 걷고 있었다.


그녀 앞의 벤치에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라이프치히까지 얼마나 머냐고. 대답이 있을 리 만무. 괴테, 아니 파우스트 박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라이프치히 방향으로 라디세우스의 핸들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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