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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귀환 알린 ‘에스텔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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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귀환 알린 ‘에스텔리타’
  • 이충건 선임기자
  • 승인 2015.12.22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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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탐구 | 바이올리니스트 선형훈


한국 바이올린 계보 이을 유망주
스승 갈라미안 사후 끝없는 방황
늦깎이 결혼 후 30년 만에 복귀


‘신동’ 소리를 듣던 바이올리니스트 선형훈(宣炯勳·51). 국내 문화기획 1세대로 고양문화재단 초대총감독
을 지낸 이상만은 일찌감치 그를 기대주로 주목했다. 정경화, 김영욱, 강동석의 계보를 이을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 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줄리아드에 재학 중이던 1983년 7월 20일 서울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독주회를 끝으로 무대를 떠났기 때문.


사실 음악계에서 방황하는 천재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마이클레빈은 정신적으로 방황하다 35세에 요절했다.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알코올과 도박중독에 빠지면서 아끼던 스트라디바리우스까지 팔고 결국 자살했다. 어린나이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다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연주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메뉴힌
이 대표적이다. 테크닉은 천재중의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어느 순간 연주가 흔들렸다. 각고의 노력 끝에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형훈은 스승의 변화로 정신적 방황을 겪은 경우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테이프 오디션을 거쳐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이반 갈라미안 교수를 스승으로 만났다. 갈라미안의 제자가 됐다는건 이미 세계적으로 클 재목으로 인정받은 것과 마찬가지. 정경화, 김영욱, 강동석, 이작 펄먼, 핑커스 주커먼, 폴 주코브스키가 그의 제자들이다.


대학생들도 한 달에 한 번 갈라미안에게 직접 레슨을 받을까말까 했지만 스승은 주말에도 열 세 살짜리 소년을 집으로 불러 지도했다. 갈라미안이 선형훈을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줄리아드는 두 달간 메도마운트에서 여름캠프를 열었다. 전 세계의 신동이 모이는 음악학교가 줄리아드라면, 그 중에서 최고의 유망주가 메도마운트 무대에 선다.


갈라미안은 선형훈이 무대에 서도록 했다. 그가 연주한 곡은 파가니니 콘체르토 1번. 그는 “그 때의 스릴, 박수갈채, 백스테이지에서의 축하 멘트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조셉 깅골드의 제자로 줄리아드
에 와 있던 조슈아 벨이 선형훈의 무대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가 됐어야 할 선형훈. 그의 방황은 스승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작고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갈라미안을 사사한지 만3년이 됐을 무렵이다. 그렇게 그는 갈라미안의 마지막 제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선형훈이 줄리아드로 돌아온 건 스무살이 되어서다. 줄리아드는 이미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도로시 딜레이를 새로운 스승으로 만났다. 사실 그는 갈라미안 사후 곧장 딜레이를 만났어야 했다. 딜레이는 유태계 문화 권력과 연결고리로 이어진 사람이었다. 가령, 아이작 스턴이 ‘노’하면 카네기홀 연주도 ‘노’가 됐을 정도. 갈라미안은 레슨만 하는 교수였던데 반해 딜레이는 문화 권력과의 네트워크, 정치적 힘을 키운 교수였다.


하지만 갈라미안과 딜레이는 원수처럼어진 사이였다. 딜레이는 갈라미안의 문하생이었고 조교까지 지냈지만, 자신만의 스쿨을 만들었다. 갈라미안은 그런 딜레이를 줄리아드에서 내보내려고까지 했다. 둘의 관계를 너무 잘 알았던 소년은 감히 딜레이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었다.


딜레이는 자신의 제자인 미도리나 사라 장처럼 제자를 어린 나이 때부터 가르치길 원했다. 딜레이는 선형훈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봤다. 딜레이는 선형훈을 조교에게 맡기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났다.


그는 낙담하고 좌절했다. 줄리아드를 그만둔 그는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됐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고 살았다.


그가 다시 바이올린을 잡은 계기는 결혼식이었다. 그는 2012년 결혼했다. 신부가 결혼식 이벤트로 연주를 원했던 것. 다른 어떤 일보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남편을 아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그는 형제들이 경영하는 유성선병원 국제검진센터 1층에서 3개월에 한 번씩 연주를 시작했다.


지난 5월 15일에는 30년 만에 독주회도 열었다. 어릴 적 신동 선형훈과 오랜 공백을 겪은 선형훈을 동시에 만난 연주회였다. 거침없는 테크닉은 13~15살 소년의 천재성 그대로였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한 놀라운 기교였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다. 긴장하는 모습도 역력했다.


선형훈을 다시 만난 건 12월 5일 대전 아트오케스트라 협연 무대였다. 멘델스존콘체르토. 경쾌하고 발랄한 표현을 최대한살린 연주가 압권이었다. 격정적이고 강렬한 템포를 제대로 살렸다. 아름답지만 슬프지 않은, 밝고 행복한 느낌도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멘델스존보다 더 감동적인 건 앙코르 곡이었다. 마뉴엘 퐁세의 ‘에스텔리타(작은 별).’ 하이페츠가 성악곡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해 편곡했는데, 이를 다시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했다. 가슴 뭉클한 곡의 분위기를 잘 살린 연주였다. 콘체르토 다음에는 그 여운이 잊힐까 앙코르를 안하는 게 관례. 선형훈이 이 곡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폭발적이고 화려한 기교만 부각됐던 선형훈의 음악성을 읽은 순간이었다. 돌아 온 천재 선형훈의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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