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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이해찬과 맞짱 뜨겠다는 ‘세종 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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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이해찬과 맞짱 뜨겠다는 ‘세종 키드’
  • 이충건
  • 승인 2015.08.3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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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김동주 변호사의 ‘386, 그리고 이후 세대’


교육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6선 관록의 국회의원 이해찬(63). 세종특별자치시 현역 국회의원이다. 겁도 없이 이 정치거물과 싸워보겠다고 나선 ‘초짜’가 있다. 김동주(44) 변호사다.


김동주는 누구?


그는 1971년 2월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상리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육군 32사단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취학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소령으로 예편한 뒤 터전을 옮기면서 초중고는 대전에서 나왔다.


당시 충남고에서는 1년에 10여 명씩 서울대에 진학했다. 스스로 “수재 소리는 못 들었다”지만 성적은 최상위권. 그도 여느 동기생들처럼 서울대 입학이 당장의 목표였다. 그러나 낙방. 그는 재수 끝에 90학번으로 서울대 전산학과(현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했다. 수학을 유달리 잘해 학과선택에서도 큰 고민은 없었다.


무얼 하고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 ‘내게 빌 게이츠처럼 성공할 능력은 없지 않은가.’ 그는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기를 포기했다. 대신 공익에 봉사하는 일을 하겠다는 막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법조계에서 그 길을 찾았다. 3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군복을 입고 출퇴근하는 아버지, 가정에서도 국가를 입에 달고 사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우선 군복무부터 마치기로 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신체검사에서 방위병 판정을 받았다. 배치 받은 부대가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근무했던 육군 32사단. 고향인 세종시와 다시 인연을 맺은 셈.


군 복무를 마치고 일단 전공공부를 충실히 했다. 진로를 바꾸더라도 전공은 충실하게 해놓자는 심산이었다.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한 건 1996년 8월 대학 졸업과 함께였다. 그리고 1998년 12월 제40회 사법시험에 무난히 합격했다.


사법연수원(30기)을 거쳐 2001년 2월 검사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인천지검. 이후 춘천지검 강릉지청, 대구지검, 부산지검 동부지청에서 일했다. 부산지검에서 검사로 재직하면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런던대 킹스칼리지에서 법학석사 학위도 받았다. 귀국해서는 법무부 검찰국, 서울중앙지검을 거쳐 부부장검사로 승진 후 동기들 중 ‘상위권’만 파견 간다는 금융위원회 법률자문관이 됐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최근 검사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의 ‘전관예우’도 포기하고 지난 20일 세종시 종촌동에 변호사 사무실도 열었다. ‘정치’라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다. 그는 지난 25일 새누리당에 입당원서를 냈다. 바로 그날 대전의 한 커피숍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탄탄대로’ 검사 포기하고 정치입문 왜?


검사나 잘할 일이지 왜 국민이 가장 불신하는 집단인 정치권에 발을 담그려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검사 시절 얘기부터 했다.


그는 고도의 지능형 사기꾼을 여럿 체포했다. “어설픈 사기범은 피해자 한 명만 잘 진술해줘도 혐의를 입증해 엄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능형 사기범은 처벌받는 걸 피하기 위해 교묘한 장치를 둡니다. 그런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서민층입니다. 자신은 물론 형제자매까지 재산을 몽땅 빼앗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한 번은 식당 일을 하는 가난한 피해자의 전 재산을 가로챈 사기 사건을 접하게 됐다. 피해자가 매우 불쌍해 보였으나 범행 수법이 너무 교묘해 죄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건 조회 결과 그는 사기범이 전국을 돌며 비슷한 수법으로 다수의 범행을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다른 검찰청에 있는 사건들을 모두 이송 받아 종합적으로 분석한 끝에 비로소 혐의를 입증할 수 있었다. 죄를 밝혀낸 뒤 피해액도 최대한 환수해 피해자들에게 돌려줬다. 그 때 그는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혹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피해자들의 눈물을 보며 같이 울었다.


그는 검찰에서도 전공이 특화된 검사였다. ‘금융’ 분야였다. 서울중앙지검에서부터다. “검찰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소외계층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는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에서 전자금융(FinTech) 정책으로 박사학위 과정도 밟고 있다. 한국금융법학회가 발간하는 <금융법 연구>란 유수의 학술지에도 곧 논문이 실릴 예정.


부부장검사로 승진하면서 부임한 금융위원회 법률자문관도 검찰에서 우수자원만 선발해서 보내는 자리다. 그런 그가 탄탄대로였던 검사직을 내려놨다. “검찰을 포함한 행정부는 국회의 정책결정 후에 역할이 주어집니다. 물론 검사로서의 법 집행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행복하고 더 나은 사회가 되려면 국회의 정책결정 단계가 중요합니다. 정책결정을 조금만 더 잘 해주면 집행단계에서 노력을 절감할 수 있고 국민에게 더 좋은 결과물을 돌려줄 수 있지 않겠어요? 똑같은 시간 일한다면 더 돌려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결론에 다다르자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검사장까지 올라가보고, 더 좋은 배경을 가지고 정치에 투신할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나이가 더 들면 자리란 게 자기만족밖에 더 되겠습니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충만할 때 뛰어야죠.”


왜 하필 세종이냐고 물었다. 초중고를 나온 대전이 더 낫지 않느냐, 세종은 6선 관록의 이해찬 의원이 버티고 있지 않느냐, 기자가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투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돈 벌려면 서울에서 개업했겠죠?”


그의 대답은 이랬다. 대전처럼 안정된 도시는 젊은 사람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지만 세종은 다르다는 것. “세종시는 행정수도로 급성장하는 도시입니다. 급팽창하면서 커나가는 도시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 줄 젊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구도심의 소외감도 살펴드려야 하고, 중하위공직자, 자영업자들이 많이 사는 신도시의 정주여건, 교육여건, 의료여건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지역구 국회의원 한 명이 이를 다 해결할 순 없지만 제 이름처럼 ‘동(분서)주’하면서 보람을 찾고 싶었습니다.”


전관예우 문화가 많이 개선됐다지만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하면 생계에 더 보탬이 될 터. 그는 이를 포기하고 세종시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자신의 돈벌이보다는 고향 발전에 관심이 크다고 했다.


“세종시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아닙니다. 일종의 다국적군이죠. 갈등요인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정주여건 미비에 따른 불만족도 크죠. 이런 것들이 법률적 다툼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큽니다. 주민과 주민, 주민과 정부 간 분쟁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의 정당한 요구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법률적 뒷받침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공직생활의 경험을 살려 자문활동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학교, 아파트단지, 커뮤니티 등.



“이해찬 어른 훌륭하시지만 세종시는 젊은 정치인이 더 적합”


새누리당 공천을 받게 되면 거물 이해찬 의원과 맞붙어야 한다. 그는 이 의원을 ‘어른’이라고 불렀다.


“이해찬 어른은 제가 서울대 다닐 때 이미 학교가 소재한 관악구 국회의원이셨어요. 그때부터 활약상을 봐온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제가 그 분처럼 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세종시에는 자신처럼 젊은 정치인이 더 적합하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해찬 어른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젊고 유능한 세대가 정치에 계속 진출해야 정치발전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해찬 어른 같은 전국적인 거물에게는 지금보다 더 적합한 일이 있다고 봅니다. 저에게는 이 지역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열심히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젊음이 있습니다. 여당이란 현실적 프리미엄도 있고요.”


그는 “할 일이 태산 같은 세종이란 젊은 도시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젊고 참신한 사람, 공직생활 등을 통해 개인능력과 가치관을 검증받은 사람, 주민들의 여러 요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며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향에 돌아왔다”고 했다.


‘민주화운동 세대’와 ‘자기계발 세대’


그는 스스로를 ‘자기계발 세대’로 규정하며 앞선 ‘민주화운동 세대’와 차별화시켰다. 정치입문에 대한 나름의 사회학적 관점으로 읽혔다.


“부모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식을 대학까지는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갖지 못하고 있어요. 직장 생활을 통해 돈을 벌어야 비로소 결혼도 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노년층을 부양하고 사회경제도 돌아가는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현재는 그렇지 못해요. 사회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발전은 더딥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기성세대의 양보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한다. “기성세대의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과 양보, 배려가 수반되어야만 비로소 청년실업 문제가 해결되고 사회의 선순환구조를 되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주문했다.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지금 우리정치는 세대 간 단절이 심각합니다. 우리사회가 발전하려면 젊은 세대들이 정치, 사회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어요. 민주화운동 세대, 이른바 386(당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 세대는 활발히 정치권에 진입했는데, 제 또래부터 시작되는 그 이후 세대는 현저히 참여율이 낮아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이후 세대를 ‘자기계발 세대’라고 정의했다. 민주화운동 세대는 독재정권의 억압에 정면으로 맞서가며 자신을 희생한 세대지만, 이후 세대는 선배들이 이룬 민주화의 토양 위에서 개인의 실력 배양에 주력한 세대라는 것. 앞선 세대는 젊은 나이부터 탄압을 받으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보니 ‘동료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거부반응이 크고 이분법적 구도에 휩쓸리기 쉽지만, 그 다음 세대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신이 강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민주화운동 세대가 스스로 기득권층이 되면서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양성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실력을 착실히 쌓아온 자기계발 세대가 신구 간 가교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그는 민주화운동 세대를 폄하하는 게 아니란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민주화 이후의 자기계발 세대들이 개별적으로 쌓아온 능력들을 사회발전을 위해 풀어놔야 한다”고 했다.


“뒤떨어진 정치 수준을 확 바꾸고 싶지 않으세요?”


공학도 출신의 검사. 독특한 이력 때문인지 대화시간 내내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기득권을 내려놓은 그가 ‘자기계발 세대’가 주도하는 새로운 차원의 정치를 가능케 할지 지켜볼 일이다.


그가 헤어지며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여야 모두 세대 간 다양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혁신해야 합니다. 뒤떨어진 정치 수준을 이제 확 바꾸고 싶지 않으세요?”


김동주는 1971년 2월 세종시 조치원읍에서 태어났다. 대전으로 이사해 내동초, 갈마중, 충남고를 거쳐 서울대 전산학과(현 컴퓨터공학부)를 졸업했다.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박사학위 과정에 재학 중이다.


대학 졸업 후 제40회 사법고시(사법연수원 30기)에 합격, 2001년 인천지검 검사로 임관한 뒤춘천지검 강릉지청, 대구지검, 부산지검 동부지청, 법무부 검찰국, 서울중앙지검을 거쳤다. 부부장검사 승진 후 금융위원회 법률자문관으로 근무하다 지난 8월 사직, 세종시 종촌동에 ‘변호사 김동주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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