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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디언’이 번역한 제발트의 첫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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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디언’이 번역한 제발트의 첫 장편
  • 세종포스트
  • 승인 2014.11.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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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현기증. 감정들’

노벨상 후보 거론되는 새 유럽 거장
기억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인간의 삶


W. G. 제발트(1944~2001)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의 작가들로부터 가장 자주 호명되며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독일 작가다. 영국 대학의 독일문학 교수에서 작가로 변신한 마흔 네 살부터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고작 13년간 작품 활동을 했을 뿐이지만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되곤 했던 유럽 문학의 새로운 거장이었다. 한국에는 마지막 장편소설 <아우스터리츠>가 2009년 번역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해 적잖은 ‘제발디언’들이 양산되고 있다. 1990년 출간된 <현기증. 감정들>은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가 “최근 몇 년간 유럽에서 들려온 목소리 중 가장 독창적”이라고 평가한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그 자신 열렬한 제발디언임을 밝힌 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번으로 나왔다.


제발트 소설의 핵심 세계를 구축하는 기둥은 여행과 기억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그의 세계에서 사실상 동의어다. 본질적으로 여행문학인 그의 작품 속에서 여행은 단지 “삶의 장소를 바꿈으로써 인생의 불운한 시기를 극복해보려는 희망”(35쪽)이 아니라 낯선 공간을 통해 그곳에 축적된 기억의 서사들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고자 하는 슬픈 해방의 행위다. 제발트의 사전에서 기억이라는 단어 앞에는 소유격이 붙지 않는다. 나의 기억, 너의 기억, 그들의 기억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가중치도 없다.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를 쓰면서도 결코 독일인이기를 원치 않았던 제발트는 자발적으로 고독한 망명자가 되어 실제의 삶을 솟아오른 백발에 천 배낭 차림을 한 여행자의 것으로 치환했다. 그 삶의 가장 내밀하고 진솔한 투영이 바로 유일하게 자전적인 이 작품 <현기증. 감정들>이다. 소설은 짧은 단편 2편과 긴 단편 2편을 약-강-약-강의 형식으로 병렬시킨다. 약에 해당하는 짧은 단편에는 각각 1813년과 1913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한 스탕달과 카프카의 전기적 사건들이 그려지고, 강에 해당하는 긴 단편에는 제발트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있다. 제각각으로 보이는 단편들을 하나의 장편으로 묶어주는 모티프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카프카의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 우연한 비극으로 인해 영원히 떠도는 영혼이 돼 버린 그라쿠스의 방랑은 소설 속 모든 여행의 원형으로 “사랑의 갈망에 대한 속죄”(157쪽)를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떠돎은 몸의 여행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여행이어서 “돌연한 과거로의 회귀”(46쪽)는 기억을 기억하기 위한 이 행로에서 매우 빈번하다. 화자는 낯선 여행지에서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어서(37쪽), 오스트리아 빈에서 고향 도시에서 추방된 시인 단테와 마주치기도 하고, 이탈리아 리바로 가는 버스 안에서 청소년기의 카프카와 꼭 닮은 쌍둥이 형제를 만나기도 한다. 30여 년 전 공부했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때의 담임선생님이 과거와 조금도 다름없는 말투로 아이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며 수업하는 모습을 보곤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던 올가라는 여인의 에피소드는 인간의 내면에 잠복한 기억이라는 폭탄을 끝내 발화시키고 마는 공간의 파괴력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서사를 요약할 수 없는 제발트의 소설은 언어로만 직조된 텍스트가 아니다. 곳곳에 삽입된 사진 및 그림 이미지는 텍스트의 보충이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라는 점에서 ‘삽입’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부정확하다. 명백하게 하나의 언어로 기능하는 이미지들은 의식과 상상과 환각이 마구 뒤섞이는 기억의 서사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며, 기억하기의 고통과 매혹이라는 소설적 주제에 기여한다. 인간은 산다. 어쨌거나 산다. 그리고 살았다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만 입증된다. 그러므로 기억, 저주이면서 축복인.


<제휴기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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