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역사가 승자만의 기록이던가?
상태바
역사가 승자만의 기록이던가?
  • 황혜진 교수(목원대 TV·영화학부)
  • 승인 2016.05.25 17: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혜진의 영화와 사회 | ‘소리굽쇠’

모순의 뿌리, 역사 거슬러 오르는 노고 통해 발견
“낮고 가난한 목소리로 고통에 동참하라는 설교”
이름 없이 스러진 자들 위해 부르는 역사의 비가

스텝과 배우의 재능기부로 완성된 <소리굽쇠>(감독 추상록)가 개봉됐다. 20년째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기억하자는 의도를 담고 있는 극영화다. 비록 상영관을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아베 정권의 역사 왜곡과 관련된 보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가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과 현재의 몰염치에 대해 분개하며 자극적인 언어로 인터넷 게시판이 달궈지는 경우는 많다.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와 결합된 담론이 그 뜨거움으로 분노를 잠시 잠재울 수는 있지만, 가해자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해결될 것은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들 자신조차 역사를 과거의 일로 묻어두려는 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거의 한 세기 전의 역사에 연연하기보다 열심히 일해서 현실에서 성공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가 생경한가? 세월호 관련법 처리가 늦어지자 피로감을 운운하며 심지어 경기 침체의 원인을 세월호 사건에서 찾으려는 논리와 어딘지 유사하지 않은가? 외환위기 이후 참으로 오랫동안 불황을 견뎌오면서 경제적 생존은 무엇보다도 엄중한 것이 됐다. 그러나 경제적 생존 역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국가에게 위임한 권력이 가져다줄 수 있는 서프라이즈 선물이 아니다. 우리 삶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모순의 뿌리는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노고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발견이 늘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소리굽쇠>는 할리우드 수준의 만듦새를 자랑하는 최근의 한국영화가 내지 못 하고 있는 낮고 가난한 목소리로 고통에 동참하라는 설교를 대신한다. 재중 위안부 귀임 할머니(이옥희)의 유일한 희망인 손녀 향옥(조안)이 한국에 들어와 반갑게 재회했던 친척으로부터 사기를 당하면서 그 목소리는 서서히 울음으로 변한다. 그토록 그리던 꿈의 땅 역시 중국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을 타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할머니에게 돌아가려 한다.


향옥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준 것은 할머니가 평생을 간직한 소리굽쇠의 또 다른 주인이자 첫사랑인 고향 오라버니의 아들 덕수(김민상)다. 원폭 피해자였던 아버지의 아픔을 알고 있는 덕수와 새로운 상처를 가슴에 새기게 된 향옥의 결합은 이 영화를 보며 유일하게 편안한 호흡을 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전쟁으로 얼룩진 동아시아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혹독한 삶이 후손들에 이르러 해피엔딩을 맞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순진한 것이었을까? 태중의 아기가 덕수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피폭 유전자로 인해 유산되자 역사는 다시 악몽이 된다. 과거는 현재 그 자체인 것이다.


다른 듯 같은 삶을 살아가는 할머니의 과거와 향옥의 현재가 오가고, 향옥과 덕수의 결합이 또 다른 과거의 비극을 환기시키는가 하면, 조선족을 타자화하며 괴물로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편협한 시각이 결국 덕수와 향옥의 죽음을 불러오면서 결국 우리도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과정은 느낌보다는 사고를 요구한다. 이 영화가 등장인물과의 동일시를 통한 몰입을 유도하기보다 관찰과 각성을 요구하고 있어서다. 더욱이 저예산 영화의 한계 안에서 일정한 미학적 성취를 시도하고자 하는 연출의 의도가 과거 재현에 있어 익숙한 사실주의적 스펙터클과 거리를 두기 때문에 만들어진 낯선 스토리텔링은 어쩌면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할머니의 거처와 과거 위안부로 유린당했던 장소, 불행한 결혼생활과 딸의 죽음에 할머니의 흐느낌으로 채워졌을 집과 이방인으로 죽어간 향옥의 혼령을 끌어안고 사는 공간이 모두 하나라는 사실은 제도권의 역사 교과서나 정치인들의 성명이 감히 가르쳐주지 않았던 진실에 관한 속삭임이기에 의미심장하다. 진실은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되어 왔으며 그 맨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어쩌면 기괴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패배주의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화사하게 웃고 있는 승자의 기록이기만 하다면 그 뒤에서 잊혀져간 수많은 존재들은 누가 애도할 것인가?


<소리굽쇠>는 가해자를 향한 분노를 칼날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굳이 어려운 소통의 길을 선택한 영화다. 한순간의 뜨거운 분노보다는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역사적 상상력이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조용히 설득함으로써 흥행과는 멀어졌을지 몰라도 과거뿐 아니라 현재를 성찰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이자 그 의식이라고 말하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침묵으로 얻은 평화, 망각을 위한 망각을 노래해 줘.” 그렇다. 역사는 기억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