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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절실한 철학,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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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절실한 철학, 존엄성
  • 세종포스트
  • 승인 2014.11.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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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삶의 격-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독일 철학자가 쉽게 풀어 쓴 에세이
인간과 자본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한국사회 곱씹을 대목 곳곳에 담겨


“여기서 배우는 건 별로 없다. (중략) 다시 말해 우리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그리고 남의 밑에 들어가는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 야콥은 벤야멘타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교장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등 하인 양성에 최적화(?)한 환경을 경험한다. 귀족 태생인 주인공이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며 찾아간 학교인 만큼 나름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벤야멘타 학교에 들어가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야콥이 가진 근대성에 대한 회의나 그로 인해 발생한 반(反)영웅적 기질과는 무관하게 그의 존엄성은 무참히 짓밟히기 시작한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가 쓴 <삶의 격-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은 존엄성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지키며 품격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냈다. 저자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 등 세 가지 관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그린다. 개인 간의 존엄성이 부딪히거나 개인과 집단의 존엄성이 충돌하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가 책의 주요 관심사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철학서는 난해하다’는 대중의 선입견을 깨고, 저자가 직접 보고 겪은 일을 소설, 영화, 연극 등과 엮어 존엄성의 개념을 일상의 언어로 쉽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장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을 인용해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그가 직접 보고 경험한 ‘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라는 소재를 추가해 메시지를 더욱 쉽고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저자는 소설과 ‘난쟁이 던지기 대회’를 통해 자발적 의지(독립성)와 존엄성이 항상 일치하지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존엄성이 개인의 자유의사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이어 다양한 차원에서 존엄성을 이야기한다. ‘만남으로서의 존엄성’에선 상대방을 깔보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해야 할 때 인정하지 않는 것도 존엄의 훼손이라 지적한다. 특히 3장 예시에 등장한 에드워드 올비의 연극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는 부부간의 사적인 은밀함도 존엄의 영역에 속하고, 이들의 은밀함이 깨져 밖으로 흘러나갈 때 어떻게 존엄성이 무너지는지 짚어낸다. ‘존엄사(안락사)’ 문제에 대해서도 저자는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이라는 개념을 들어 생사결정권을 오롯이 당사자의 몫으로 돌린다.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자의 화법이다. 저자는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대신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존엄을 상실하는 순간을 찾아내 이를 담담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난쟁이 던지기 대회’에서 타인에 의해 내던져지는 난쟁이는 그 일을 돈을 받는 하나의 직업이라며 떳떳해하지만, 저자는 자본축적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해 스스로 ‘장난감’이 되는 것은 존엄성을 헤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사회, 특히 세월호 참사, 용산참사 등 자본과 인간 사이에 무게 추를 매단 한국사회가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 책 곳곳에 담겨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 <리스본 행 야간열차>로 문학가로서의 명성 역시 높은 저자답게 빼어난 문장력과 탁월한 비유로 ‘읽는 즐거움’까지 전달하는 책이다.

<한국일보 제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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