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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모순에 빠진 아베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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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모순에 빠진 아베의 역사인식
  • 남 청('철학 무게를 벗다' 저자)
  • 승인 2014.10.06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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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산책 | 역사 왜곡



아베, 진리가 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상대주의 독단성·논리적 모순에 경종
역사의 교훈, 냉엄하고 확고부동한 사실 아는 것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한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에서 자기가 만든 방패를 들고 이렇게 소리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을 들고는 “이 창을 보십시오. 이 예리한 창은 어떤 방패도 뚫어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그 예리한 창으로 그 견고한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상인은 말문이 막혀 서둘러 자리를 뜨고 말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유래한 이야기다. 모순은 창 모(矛), 방패 순(盾) 두 글자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방패도 뚫는 창이나,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는 있을 수 없기에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요즈음 한일관계가 아주 껄끄럽다. 아베 일본 총리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식에 어긋난 언행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침략의 정의(定義)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건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 어느 쪽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는 그의 발언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로 끔직한 고통을 당한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역사를 보는 시각은 물론, 자신이 한 말의 논리가 모순에 빠져있음도 모르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기까지 하다. 과연 그가 말한 대로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고 보는 시각에 따라 각각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소피스트(Sophist)라 부르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여 진리와 도덕에 있어서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주장했다.


“진리는 너에게는 그것이 너에게 나타난 그대로요, 나에게는 그것이 나에게 나타난 그대로이다. 진리의 척도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사람에 따라 보이는 그대로이다.”


이것이 소피스트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진리의 보편적 가치는 부정되고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는 승인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진리의 잣대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라는 점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인 것이다.


소피스트의 이러한 진리관은 그들의 윤리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선악에 관한 도덕의 문제 역시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나에게 선한 것이 때로는 너에게 악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나에게 악한 것이 때로는 너에게는 선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도덕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보편적이고도 객관적인 기준이 없으며 오직 그때그때 각자에게 주어지는 주관적인 의견(意見), 곧 각자의 생각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소피스트의 주장에 경종을 울린 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도덕의 상대성을 주장했던 소피스트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진리와 도덕의 기준이 개개의 인간에 있다면, 그래서 저마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따라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도덕과 윤리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같이 승인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인정할 수 있는 가치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과 윤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고 그런 사회가 어떤 모습의 사회가 될 것인지는 우리 모두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진리와 도덕에 대한 상대주의 입장은 언뜻 보면 논리적으로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독단적인 요소와 논리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이 자기모순에 빠졌음을 지적하는 것은 그가 역사를 지극히 자기주관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역사란 이미 지나간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역사적 사실이란 그 자체로서 독립성과 객관성을 갖는다. 역사에 있어서의 진실은 사실 자체가 갖는 진실이다. 냉엄하고도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만이 진실이다. 그러한 진실은 후대 사람들의 가치판단에 의해 임의로 바꾸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유관순 열사에 관한 내용이 누락된 교과서가 다수 있음이 드러나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유인즉 교과서를 집필한 필자가 자신의 역사적 가치판단을 통하여 이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 역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역사적 사건이 개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 기술되기도 하고 삭제될 수도 있는 것인지,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Ranke)는 “역사적 진실이란 사실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을 통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못 박고 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 자체로서 기술되어야 하고 인식되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만일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후대 사람의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당파적 관점에 따라 그 색깔이나 윤곽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가져온다. 역사가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의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해석된다면 역사는 얼마든지 변색될 수 있으며 역사의 객관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는 역사가 교훈적이고 실용적인 면으로 빠지지 않도록 모든 가치판단으로부터도 초연해야 한다. 역사란 과거를 심판하는 것도 아니며 현 세대에 교훈을 주는 것도 아니다. 만일 역사가가 과거의 심판자가 되려고 하거나 현 세대의 교사가 되려고 한다면 역사는 그러한 심판자나 교사의 도덕적 가치판단에 따라 어느 일방적인 면만이 조명될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역사의 객관성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역사가 주는 진정한 교훈은 사실을 아는데 있다. 냉엄하고도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만을 엄격하게 고수하면서 어떤 훈계도 하지 않고, 도덕적인 교훈도 제시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보태지도 않은 채 다만 역사적 진실만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랑케의 소망이요 역사기술의 목적이었다.


아베 일본 총리도,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집필자도 역사에 대한 섣부른 가치판단이 자칫 역사를 왜곡하고 욕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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