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사색 더 일반화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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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사색 더 일반화되어야
  • 정병조(철학박사, 금강대 총장)
  • 승인 2014.08.0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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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 죽음의 번뇌
정병조 박사
정병조 박사

모든 생명이 거쳐야할 ‘통과의례’

웰빙·힐링보다 ‘웰다잉’ 중시돼야

우리가 흔히 서양이라고 부르지만 유럽과 미국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유럽은 그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어디를 가든 바로크 풍의 웅장한 건물들과 함께 문화적 감수성, 예술적 자부심이 두드러진다. 반면 미국은 첨단기술과 풍부한 자본이 느껴지며 광활한 대지위에 자유로운 물결이 흘러넘친다. 유럽에 비해 스케일이 크고 또 세계제일주의의 자존심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이 두 지역에는 공통적인 면이 있다. 즉 질서를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삶의 흔적들이 여유롭다.

서양의 양지바른 마을 어귀에는 어김없이 공동묘지가 있다. 무덤이 음습함의 상징인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여기느냐 단절로 여기느냐의 차이다. 죽음에 대한 사색이 더 일반화되어야 선진국다운 역량을 갖출 수 있다.
서양의 양지바른 마을 어귀에는 어김없이 공동묘지가 있다. 무덤이 음습함의 상징인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여기느냐 단절로 여기느냐의 차이다. 죽음에 대한 사색이 더 일반화되어야 선진국다운 역량을 갖출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공동묘지의 풍경이다. 양지바른 마을 어귀에는 어김없이 공동묘지가 있다. 꽃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사람들은 마치 산 사람을 대하듯 망자를 돌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묘비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혹은 다정하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음습함의 상징이다. 으스스하고 다소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사실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일이고 삶의 연장일 뿐이다. 모든 태어난 생명은 죽어야 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죽음을 영원한 단절로서만 이해한다. 한국인들은 죽음을 떠 올릴 때면 늘 재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제일이다’라는 읊조림 속에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만이 보인다.

그러나 죽음을 연상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에서는 삶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 사색하고, 죽음 이후의 삶을 연상할 때 비로소 우리들 삶에는 의미가 부각될 수 있다. 모든 종교에서는 이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편들이 제시되고 있고, 또 내세에 대한 갖가지 상상력들이 투영(投影)되고 있다. 요즘 웰빙이니 힐링이니 말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그 보다 중요한 일은 웰다잉이 아닐까 싶다.

앞서간 선현들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천수(天壽)를 누린 담담한 죽음, 전장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죽음, 세속적 영화를 탐하다가 가는 비겁한 죽음, 그 숱한 흔적들을 보면서 나에게는 어떠한 결말이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선사들의 죽음을 존경한다. 마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듯이 홀가분하게 색신(色身)을 벗는다. 자신의 죽음마저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경지가 도(道)의 참 모습이다.

한국인들의 죽음은 관념적이고 사치스럽다. 바깥에서 죽으면 객사(客死)이기 때문에 꼭 집에서 죽어야 한다. 또 죽을 때는 식구들에게 둘러싸여서 죽어야 한다. 임종을 못한 자식은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예고된 죽음이라면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아무도 내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죽음이란 고독처럼 그렇게 엄습하는 삶의 마지막 흔적일 뿐이다.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또 사치스러운 종말만을 바라는 것은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한국의 문학작품, 구전(口傳) 등에는 내세를 그린 경우가 없다. 거의 현실 중심적이고 또 현세이익적이다.

선녀의 옷을 훔친 두레박 설화는 북방민족들에게는 비슷하게 전승되어 온 설화이다. 그러나 끝부분이 바뀐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모든 설화들은 나무꾼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만 하늘에 가서 선녀를 데리고 내려와서 잘 살다 죽는 것으로 끝난다. 단군신화의 모티브 역시 하늘의 신이 인간 세상에 살기를 원한다는 줄거리다.

이제 불교를 비롯한 모든 한국의 종교가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내막이 이해된다. 내세보다는 현실에 액센트를 주는 한국적 특성에 종교마저 동화된 케이스다. 고려 말의 선승이었던 나옹 혜근 스님은 마음공부의 열 가지를 설파한 적이 있다. 그 마음공부의 마지막 단계가 인상적이다. ‘나고 죽음을 벗어났다면, 그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몸뚱어리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卽說生死 須知去處 四大各散 向甚處去)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삶의 멍에라면, 이 절박한 물음이 우리의 삶을 관통해야 한다.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또 바람직한 죽음을 예비하는 일은 돈 벌고 출세하는 일 보다 훨씬 값지고 훌륭한 일이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한참 더 있다 생각 해야지’라는 마음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목이 마를 때 우물을 파지 않는다. 목마르지 않을 때 우물을 파서 대비하는 일이 현명한 삶이다. 죽음에 임박해서 죽음을 예비하는 것보다 미리 대비하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다. 죽음에 대한 사색이 보다 일반화되는 것 또한 선진국의 역량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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