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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아닌 사람의 논리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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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아닌 사람의 논리 회복해야
  • 강수돌(고려대 교수)
  • 승인 2014.07.2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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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사회 | 세월호 참사 반복하지 않으려면

인간성 회복 가로막는 장벽 척결해야
천박한 자들의 지배 방관해선 안 돼
진정한 애도, ‘행동하는 양심’ 되는 것

강수돌
강수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반드시 그 과거를 반복하게 된다." 스페인 출신의 미국 철학자 G. 산타야나의 명언이다.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이 명구를 새삼 떠올리는 것은 왜일까?

굳이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을 겪은 바 있다. 올해 2월에도 부산외대 학생들이 경주 마리나 리조트 호텔에서 행사 도중 목숨을 잃기도 했다. 물론 ‘위험사회 대한민국’을 경고하는 각종 사고나 지표를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이들은 시험 성적 때문에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있고, 어른들은 일하다가 산재로 목숨이 오락가락 할 수 있다. 아무 위험에 노출되지 않은 것 같은 일반인들도 먹고 마시는 음식이나 공기를 통해 생명을 위협할 나쁜 물질(방사능, 환경호르몬, 중금속 등)을 흡수하고 있는지 모른다.

더 이상 무고한 아이들을 죽이지 않으려면 반드시 과거를 기억하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산 자’들의 공동 책임이며 ‘죽은 자’들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다.
더 이상 무고한 아이들을 죽이지 않으려면 반드시 과거를 기억하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산 자’들의 공동 책임이며 ‘죽은 자’들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다.

하지만 무려 302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 정말 어이가 없을 뿐 아니라 ‘과연 이 나라에서 계속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감마저 든다. 특히 죽은 이들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라 느끼는 순간 그런 느낌은 더 강하게 든다. 사실, 그들이 탄 배는 보통 우리가 탈 수 있는 배이며, 설사 배가 아니라 할지라도 기차나 지하철, 비행기 등 모든 공공 교통수단, 모든 공공장소가 세월호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 초기에 우리 모두는 ‘설마, 저 정도의 사고를 수습하지 못하겠어?’라 보았고 그런 마음을 반영하듯 ‘전원 구조’라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곧 그 보도는 허위였고, 오히려 갈수록 사태는 나빠졌다. 배가 점점 가라앉는데 ‘도대체 뭐 하는 것인가?’라는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팬티 차림으로 저 혼자 탈출하는 선장의 모습’이 언론에 부각되었으며 ‘병상에 누워 젖은 돈을 말리는’ 이상한 모습의 선장이 사태의 진실을 가리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는 이상한 구조’가 드러났고, 이제 우리는 ‘생명 구조가 아니라 시체 인양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시체 인양조차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준 충격과 슬픔, 분노는 너무나 막대하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 지인들이 경험하는 트라우마(마음 깊은 곳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그 장면을 언론을 통해 보거나 현장 방문을 통해 간접 경험하는 사람들조차 간접적 트라우마를 겪기도 한다. 이런 트라우마가 남기는 각종 스트레스 지표들(PTSD)은 불면증이나 짜증, 악몽, 공격성, 우울증, 무력감 따위로 나타난다. 트라우마 치유가 안 될 때, 사회가 더 병드는 까닭이다.

일차적으로는 희생자와 가족들에 대한 사회 전체의 애도와 위로, 함께 슬퍼하고 함께 있어 주는 행위 등이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치유가 병행되지 않으면 그런 개인적 치유의 효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25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목숨을 잃은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던가. 개인적 치유와 함께 사회적 치유가 병행되어야 비로소 개인의 트라우마도 서서히 극복될 것이며, 나아가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게 건강한 사회 시스템이 구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사회적 치유의 방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크게 몇 단계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가장 우선적으로는 온 사회 구성원이 희생자와 생존자, 그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 충격을 나눠야 한다. 당연히 관심과 기억, 애도와 위로가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둘째, 배와 승객을 버리고 달아난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법적·인간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일각에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그것까지 밝혀야 한다.

셋째, 해경, 해군, 재난통제소, 정부 등 책임성 있는 당국의 진지한 사과와 사죄, 그리고 분명히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시민사회나 SNS에서는 대통령 사퇴까지 요구한다.

넷째, 점점 드러나는 청해진과 언딘(민간구난업체), 해경 사이의 인적·물적 유착관계, 그리고 그들과 정치권의 밀착까지 밝혀내고 책임자 처벌로 이어져야 한다. 썩은 곳을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다섯째, 여태껏 미해명 문제들, 일례로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나 해경 간부가 선장을 집에서 재워준 이유, 목포 통제소와의 최초 교신 내용, 정확한 사고 발생 시점 등도 밝혀야 한다.

바로 여기서 나는, 히틀러 치하의 오른팔이었던 괴벨스의 괴상한 명구를 기억한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 이것이 섬뜩한 까닭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지배의 시각, 즉 자본의 시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비록 하나의 사고에서 출발했지만, 크게 보면 자본(돈벌이 논리)의 산물이다. 따라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은 삶의 전방위에서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사람의 논리를 회복하는 길속에 있다. 302명의 죽은 자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위로하고 다시금 만날 수 있는 길은 우리 모두가 다시금 (돈에 의해 상실한) 인간성을 되찾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회복할 수 없게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을 사회적으로 척결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격과 자질이 의심되는 자들이 정치와 행정을 하겠다고 나서는 (실은 권력에 대한 탐욕, 돈벌이에 대한 맹신을 가진) 꼴 부견의 현실을 좌시해서는 안 되며, 그런 천박한 자들이 대중 앞에 나서서 우리를 지배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진실, 진리, 정의에 기초한 ‘광장의 정치’ 또는 ‘생동하는 운동’이 필요한 까닭이다. 6·4 선거는 물론 일상생활에서조차 우리는 엄마 품처럼 따뜻한 마음과 더불어 칼처럼 날카로운 눈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무지와 무관심, 무기력이 ‘공공의 적’임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무고한 아이들을 죽이지 않으려면, 더 이상 소중한 생명을 해치지 않으려면, 반드시 ‘과거를 기억’하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산 자’들의 공동 책임이며 ‘죽은 자’들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자 ‘자라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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